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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묘련사중흥비(妙蓮寺重興碑)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율장(律藏), 경장(經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이 유일하다.
 
묘련사중흥비(妙蓮寺重興碑)
 
묘련사 중흥비는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삼현리에 있던 묘련사를 중창한 사실을 기술한 비.
이제현이 1336년(충숙왕 복위 5)에 지은 비문이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 전한다.
비문의 내용은 개경의 진산인 숭산이 남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위치한 묘련사는
충렬왕과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법화경을 강론하기 위한 원찰로 1283년에 법당을 짓기 시작하여
1284년에 완성하였는데, 그동안 천태 승려들이 대를 이어 주석하였으나 퇴락해진 것을 
1336년에 의선(義璇)의 주청으로 묘련사를 중수하여 새로운 면모로 만들었음을 기술하였다.
천태종의 중심 사찰로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요한 사찰인 묘련사의 창건과 중창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기록 한문 원본
妙蓮寺重興碑 (李 齊 賢) 
 
京城之鎭曰崧 宋徐兢高麗國經 以松岳爲松山 其東岡南迤歧而西折微伏而豐起又分而南爲三峴遠而
望之若龍蟠焉近而視之若鳳峙焉據龍之腹附鳳之膺有佛者之宮曰妙蓮寺我忠烈王與齊國大長公主尊
信佛氏謂入佛之道法華經最邃暢經之義天台疏悉備卜勝地立精舍繙經以求其道講䟽以硏其義將以祝
釐於天子邀福於宗祏者也堂構于至元二十年之秋明年之夏而落成開山者獅子菴老宿洪恕實惟其人洎
圓慧國師主盟結社而恕又副之三傅而至無畏國師學者盆臻自忠烈王旣甞重席於圓慧攝齋於無畏而忠
宣王尤重其禮凡所以庀護院門禪敎列刹莫敢望焉前乎無畏者曰禧曰因後乎無畏者曰璉曰泓曰熖曰如
及今堂頭曰吉皆釋林之選相繼而維持鍾魚香火無替于始而棟宇之撓傾蓋瓦級甎之腐且缺蓋歷六十年
之久勢之必至者也菴璇圓惠之嫡嗣無畏之猶子 天子錫號三藏命住燕都之大延聖寺后至元丙子降
香東歸從容言於忠肅王曰妙蓮之爲寺忠烈忠宣之祇園也其眞容故在殿下葺而新之奉先之孝孰此爲大
王聞而有感遂捨金銀寶器數百萬歸諸常住其徒莫不相勸或惎以謀或奮其力維 維堂維廚維廊撓者繕
傾者立腐者易缺者補侈像設之儀贍齋廚之費益樹靑松繚以崇墉璇公善大字乃金書佛殿額揭之簷間光
爭日星則又莫不相慶以爲能事畢矣宜刻石示後合辭請於朝土命臣某爲文竊惟剏之之難不如守之之難
守之之難又不如興復之爲難也茲寺也忠宣弘忠烈之願而忠肅修之無畏襲圓惠之跡而璇公起之詩所謂
維其有之是以似之者其在茲乎彼國若家子若孫能無忘祖考之業弊將修之踣將起之亦如茲寺之爲雖至
百世而不隕可也顧不休哉某幼從先東菴進退於無畏之門璇公又辱與之遊況吾君有命曷敢以鄙拙辭其
銘曰五竺之邦維聖斯作思濟生靈應病而藥末宣妙法顯實于權靈山一會開卷儼然彼欝者阿有侐精舍兩
致德人載敭慈化道無通塞器有成虧匪賢且智疇克完之允也順菴一言感主述志先王賜金秘府乃營乃葺
美哉奐輪溪山雲月雖舊惟新飮以醍醐燻以薝葍福我皇元爰及宗國
 
기록 한문 판독
妙蓮寺重興碑  李齊賢 
京城之鎭曰崧 〔宋徐兢高麗圖經 以松岳爲崧山〕 其東岡南迤 歧而西折 微伏而豐起 又分而南爲
三峴 遠而望之 若龍蟠焉 近而視之 若鳳峙焉 據龍之腹 附鳳之膺 有佛者之宮曰妙蓮寺 我忠烈王
與齊國大長公主 尊信佛氏 謂入佛之道 法華經最邃 暢經之義 天台疏悉備 卜勝地立精舍 繙經以求
其道 講疏以硏其義 將以祝釐於天子 邀福於宗1)者也 堂構于至元二十年之秋 明年之夏而落成 開
山者獅子菴老宿洪恕 實惟其人 洎圓慧國師主盟結社 而恕又副之 三傳而至無畏國師 學者益臻 自
忠烈王旣嘗重席於圓慧 攝齋於無畏 而忠宣王尤重其禮 凡所以2)
護院門 禪敎列刹 莫敢望焉 前乎無畏者 曰禧曰因 後乎無畏者 曰芬曰璉曰泓曰熖曰如 及今堂頭曰
吉 皆釋林之選 相繼而維持 鍾魚香火 無替于始 而棟宇之撓傾 蓋瓦級甎之腐且缺 蓋歷六十年之久 
勢之必至者也 順菴 圓惠之嫡嗣 無畏之猶子 天子錫號三藏 命住燕都之大延聖寺 后至元丙子
降香東歸 從容言於忠肅王曰 妙蓮之爲寺 忠烈忠宣之祇園也 其眞容故在 殿下葺而新之 奉先之孝 
孰此爲大 王聞而有感 遂捨金銀寶器數百萬 歸諸常住 其徒莫不相勸 或惎以謀 或奮其力 維寢維堂
維廚維廊 撓者繕傾者立腐者易缺者補 侈像設之儀 贍齋廚之費 益樹靑松 繚以崇墉 璇公善大字 乃
金書佛殿額 揭之簷間 光爭日星 則又莫不相慶 以爲能事畢矣 宜刻石示後 合辭請於朝 王命臣某爲
文 竊惟刱之之難 不如守之之難 守之之難 又不如興復之爲難也 茲寺也 忠宣弘忠烈之願而忠肅修
之 無畏襲圓惠之跡而璇公起之 詩所謂維其有之 是以似之者 其在茲乎 彼國若家子若孫 能無忘祖
考之業 弊將修之 踣將起之 亦如茲寺之爲 雖至百世而不隕 可也 顧不休哉 某幼從先東菴 進退於
無畏之門 璇公又辱與之遊 況吾君有命 曷敢以鄙拙辭 其銘曰
五竺之邦 維聖斯作 思濟生靈 應病而藥 末宣妙法 顯實于權 靈山一會 開卷儼然 
彼鬱者阿 有侐精舍 兩致德人 載敭慈化 道無通塞 器有成虧 匪賢且智 疇克完之 
允也順菴 一言感主 述志先王 賜金秘府 乃營乃葺 美哉奐輪 溪山雲月 雖舊惟新
飮以醍醐 燻以薝 福我皇元 爰及宗國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 지음
출처 : 익재난고(益齋亂藁) 권7
 
서울(개경)의 진산(鎭山)을 숭산(崧山)이라 하는데,
송나라 서긍(徐兢)2)의 고려도경(高麗圖經)3)에 송악(松岳)을 숭산이라고 했다.
그 동쪽 등성이가 남으로 뻗어가다 갈라져 서쪽으로 꺾어지며 조금 낮아졌다 큼직하게 솟아나고, 
또 갈라져 남으로 뻗어가다 세 개의 고개가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용(龍)이 서려 있는 듯하고,
가까이서 보면 마치 봉황이 우뚝 서 있는 듯한데,
용의 배에다 터를 잡고 봉황의 가슴에다 세운 부처의 궁전이 있으니, 
이것이 묘련사(妙蓮寺)4)이다.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함께 부처를 높이 신앙하였는데,
"불법에 들어가는 길은 법화경(法華經)5)이 가장 심오하며, 
불경의 뜻을 시원하게 풀이한 것은 
천태소(天台疏) [천태지의(天台智)의 법화경소(法華經疏)]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여,
좋은 땅을 가려 정사(精舍, 절)를 세우고, 
법화경을 번역하여 도(道)를 구하고,
천태소를 강론하여 경의 뜻을 연구하게 했으니,
장차 천자(天子)에게 복을 빌고 종묘(宗廟)에 복이 내리게 하려 한 것이었다.
 
충렬왕 1283년 가을에 법당을 짓기 시작하여
이 듬해 여름에 낙성(落成)하였는데, 개산(開山, 절을 처음 세우는 것)한 사람은
사자암(師子庵)의 노숙(老宿, 오래도록 수행한 덕이 높은 승려) 홍서(洪恕)가 바로 그 사람이다. 
원혜국사(圓慧國師)6)가 결사(結社)를 주관할 때에 홍서가 또한 차석(次席)이었으며,
삼대(三代)를 전하여 무외국사(無畏國師) 때에 와서는 배우는 사람이 더욱 모여들었다. 
충렬왕 때부터 일찍이 원혜국사에게 중석(重席, 좌석에 요와 방석을 이중으로 까는 것. 존경을 뜻함)하였고,
무외국사에게 재(齋)를 맡도록 하였으며, 
충선왕께서는 더욱 예의를 두텁게 하여,
무릇 원문(院門, 사원)의 보호 받음을 선교(禪敎)의 다른 절들은 감히 바랄 수가 없었다.
 
무외국사 이전에는 희(禧)나 인(因)과 같은 이들이 있었고, 
무외국사 이후에는 분(芬)이나 연(璉)이나 홍(泓)이나 염(焰)이나 여(如)와 같은 이들이 있었으며, 
지금의 당두(堂頭, 절의 주지) 길(吉)과 같은 스님들은 모두 석림(釋林, 불교계)의 특출한 사람들로서, 
서로 이어받아 유지하여 범종과 목어(木魚)와 분향(焚香)과 촛불7)공양을 처음과 다름없이 하였다. 
그러나 집이 기울어지고 기와와 벽돌이 썩고 이지러진 것은 
대개 6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사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순암(順菴) 의선공(義旋公)8)은 원혜국사의 적자이자 무외국사의 조카이다.
중국의 천자가 삼장(三藏)이란 호를 내려 연도(燕都북경)의 대연성사(大延聖寺)에 있도록 하였었는데, 
1336년 천자가 준 향을 가지고 동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충숙왕에게 아뢰기를,
"묘련사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기원(祈園)9)으로서 그 분들의 초상이 옛 그대로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새로 중수하신다면, 선대를 받드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듣고 감동하여 드디어 금과 은과 보기(寶器) 수백만을 희사하여 상주(常住)의 재산으로 하니,
불도들도 서로 권면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어떤 이는 계획을 짜고, 어떤 이는 힘을 바쳤다.
방과 마루와 부엌과 행랑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것은 수선하고 기울어진 것은 바로잡으며,
썩은 것은 바꾸어 넣고 이지러진 것은 보완하였다.
불상을 봉안하는 의례를 아름답게 하고 재(齋)지내는 비용을 넉넉히 하며,
푸른 소나무를 더 심고 담장을 높이 둘러 쌓았다.
의선공(義璇公)이 큰 글씨를 잘 쓰므로
불전(佛殿)의 편액(扁額, 현판)을 금분으로 써서 처마 사이에 걸어 놓으니,
광채가 해와 별과 겨루게 되었다.
그러니 또한 일이 다 끝난 것을 서로 경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마땅히 돌에 새겨 후세에 남겨야 한다 하여 말을 합하여 조정에 청하니,
왕은 신(臣) 저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창건(創建)하는 어려움이 수성(守成)하는 어려움만 못하고,
수성하는 어려움은 또한 일으켜 회복하는 어려움만 못하다
이 절은 충선왕이 충렬왕의 축원을 넓히기 위해 크게 짓고,
충숙왕이 보수했으며,
무외국사가 원혜국사의 자취를 계승하고
의선공이 다시 일으켰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오직 마음에 있으므로 그와 같이 했다(誰其有之 是以似之)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나라와 집안도 자손들이 능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업을 잊지 않고 
퇴락하면 수리하고 쓰러지면 일으키기를
또한 이 절과 같이 한다면 비록 백대에 이를지라도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생각하건대 아름답지 아니한가?
 
나는 어렸을 때 선친 동암(東菴)을 따라 무외국사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또한 의선공은 나와 함께 지냈으며,
더구나 우리 왕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어찌 감히 문장이 비루하고 졸렬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명(銘)하기를,
 
오천축(五天竺) 나라에 성인이 나시어
중생의 생명을 살리려고 병에 맞춰 약 주셨네.
오묘한 불법(佛法) 펼 수 없어 권도(權道, 방편)로 실제를 드러내시니
영취산(靈鷲山)10)의 한 모임, 책을 펴니 엄연하도다.
울창한 저 언덕에 고요한 정사(精舍, 절) 있어
두 차례나 덕인(德人)을 청하여 자비의 교화 밝혔네.
도는 트이고 막힘 없지만, 그릇은 이뤄지고 이지러지기도 하나니
어질고 또 지혜롭지 못하면 뉘 능히 완성하랴.
진실한 순암공이여 한마디로 왕을 감동시켜
선왕의 뜻을 이어 짓고 비부(秘府, 왕의 창고)의 돈 내리셨네.
조영하고 중수하니 환하게 아름답구나.
시내와 산, 구름과 달도 예전 그대로건만 새로워 보이누나.
제호(醍醐 맛 좋은 최고의 우유 제품) 같은 가르침에 배가 부르고
담복(薝蔔 향기가 매우 좋은 치자 나무꽃)같은 향기에 물들어
우리 원나라를 복되게 하고 이어서 우리나라에도 미치게 하였네.
 
1)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1301년 과거에 합격하고 1314년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며 원의 문인들과 접촉을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공민왕이
   즉위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356년에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를 수습하고 다음해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성리학의 보급에 노력한 권보(權溥, 조련의 사위 권렴의
   조부로 권보의 따님이 이제현의 부인이다)의 문생이었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였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의 저술이 있다. 
2) 송의 관리로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견문기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남겨 당시 고려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3) 고려에 왔던 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 견문기. 
4) 개경에 있던 절. 고려 후기 천태종의 중심 사찰.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와 함께 원찰로 조성하여
   1284년 원혜국사( 圓慧國師)가 주관하여 제1세로 삼았다. 이후 천태종의 고승들이 주석하며 번영하였다.
5)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성문 연각 보살이 세 부류의 가르침이 모두 하나의 불승(佛乘)에 포섭된다(회삼귀일會三一)는 
   것과 석존의 성불은 금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량겁 전에 성불하여 상주불변하며 그동안 영취산을 등에서
   항상 교화하고 있었다는 구원성불(久遠成佛)이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경전.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경전 중의 하나. 화택유(火宅喩) 약초유(藥草喩) 궁자유(窮子喩) 등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내용을 쉽게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견보탑품(見寶塔品)은 불탑숭배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은 고난 받는
   고난 받는 중생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관음신앙의 전거이기도 하다. 
6) 경의(景宜). 백련사의 제6세 사주.
7) 사찰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예불의 구성 요소. 법당 밖에서 울리는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의 사물(四物)과,
   이어 법당 안에서 거행하는 예불에 향과 촛불과 청정수 공양을 불단에 기본적으로 올린다. 따라서 이런 구성물은
   예불을 행하고 있다는 뜻이니 사찰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물인 셈이다. 
8) 의선(義璇). 고려 말의 권문세가였던 조인규(趙仁規)의 넷째 아들로 출가한여 원혜국사(圓慧國師) 경의(景宜)의 
   제자가 되었다. 개경의 묘련사를 본격 중수하였다. 1312년에 의선의 백부인 혼기(混其)가 만의사(萬義寺)를 중수하여
   법화도량으로 삼고, 의선이 법화를 중흥하였다. 원에서 삼장법사(三藏法師)의 칭호를 받고, 대찰인 대연성사(大延聖寺)
  주지를 지내고 1336년에 귀국하였다. 1322년 이후 혼구(混丘)에 이어 영원사의 주지를 지냈다.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가 경의의 사제가 되므로 이 비문에서 정오의 조카라고 기록함.
9)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약칭.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당시 인도의 주요 나라였던 코살라국(憍薩羅國) 
   사위성(舍衛城)에서 설법하려 때에 급고독(給孤獨,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자)이라는 사람이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사서 정사(精舍)를 지어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 절 이름을 짓고 여래를 초청하여 설법을 들었다.
   재가신자가 부처에게 시주한 첫 번째의 절이기 때문에, 신도들이 지어 시주하는 사원의 대명사로 쓰여 왔다. 
10) 부처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중인도(中印度) 마가다국(摩揭陀國)에 있는 명산(名山). 산 정상이
    매와 같고 또 매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가여래가 일찍이 이 산에서 『법화경(法華經)』등을 설하였다.
    법화경의 내용이 오묘한 불법을 인간에게 알리는 것이 쉽지 않아 쉬운 비유를 들어 깊은 이치를 알 수 있도록
    설하였기 때문에 개권현실(開權顯實)의 가르침이라 한다. 
 
 
출   처 : 고려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유산지식이음 금석문(金石文),
묘련사 : 고려충렬왕이 1284년(충렬왕 10) 그의 원찰(願刹)로 창건하였다. 개산조(開山祖)는 홍서(洪恕)이나, 이 절에서
           열었던 신행결사(信行結社)인 묘련결사(妙蓮結社)의 주맹(主盟)은 원혜국사(圓慧國師)가 맡았다. 
           묘련사는 법화경을 강하여 널리 천태사상(天台思想)을 선양하는 중심사찰이 되었으며, 천태종의 결사도량인
           백련사(白蓮社)의 분원 역할을 맡게 되었다. 1336년(충숙왕 복위 5)원나라로부터 귀국한 의선(義璇)의 청을 
           받아들여 절을 크게 확장 중수하였으며, 묘련사를 중심으로 다시 개경에다 법화경에 대한 신앙을 크게 펼쳐 
           나갔다. 고려 말에는 충렬왕과 충선왕·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찻물을 담는 돌그릇 석지조(石池竈)가 있었다. 
           묘련사터 위치 : 현재 개성시 동현동으로 개성시 남대문 남쪽 낙타교(야다리) 옆.
판독자 : 정병삼
주   석 : 묘련사중흥비(妙蓮寺重興碑)는 익재난고,동문선,동국여지지, 연경재전집등 각종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작   성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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