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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행적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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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공의 행적은 전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출생에서 서거(逝去)까지 몇 부문(部門)으로 나누어 출생 성장, 무반(武班)진출, 재신(宰臣) 및 수상 등용(首相 登用), 탁월한 외교활동, 조비 무고사건(趙妃 誣告事件)으로 구금 유배(拘禁 流配), 복권 복위(復權 復位) 및 특전, 계자유훈(戒子遺訓)과 서거(逝去), 후손에 물려준 위업(偉業) 등을 고려사(高麗史), 묘지명(墓誌銘) 등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요약 발췌(拔萃)하여 실었다.
 
1) 서광(瑞光)을 품고 태어나 성장하였다
정숙공은 상서로운 기운이 어린 가운데 평양의 식달현(息達縣)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해가 몸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상서롭다 하여 식달(息達)을 상원(祥原)으로 고치고 공신(功臣)이 된 후에는 상원군(祥原郡)으로 승격하였다는 사실이 상원읍지(祥原邑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였으며 놀이(遊戱)를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가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아 몽고어(蒙古語)를 가르칠 때 여기에 선발되어 몽고어(蒙古語)를 교육받았다. 정숙공은 겉모습이 아름답고 말과 웃음이 적으며 전기를 모두 읽었다(섭렵:涉獵)는 고려사 열전의 기록과 같이 외모와 성품이 아름답고 훌륭하였으며 다른 사람과 다르게 성장하였다.
 
2) 시대상황을 미리 살펴 문반(文班)보다 무반(武班)으로 진로(進路)를 결정하였다.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정숙공은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공을 세우고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큰 뜻을 품고 문과보다 武科를 선택하여 1269년(원종10년)부터 4년간 왕의 수행요원으로 재직하여 많은 보좌역할을 수행하였고, 1274년 충렬왕이 왕위를 계승할 때 공로가 많아 중랑장(中郞將:正五品)으로 임용되는 한편, 장군 지합문사 겸 어사중승(將軍 知閤門事 兼 御史中丞)에 이어 1278년(충렬왕4년)에 대장군(大將軍:從三品), 그리고 1282년(충렬왕8년)에 무과(武科)의 최고위 직인 상장군(上將軍:正三品)에 임명되어 신호위(神虎衛)의 사령관(주:1참조)을 역임하였다. <이때 나이는 46歲임>
[주:1] 상장군(上將軍)은 정원이 8명으로 2개 군(軍) 6개 위(衛)의 최고위 직이며 현재의 제도로 비교하면 사령관에 해당되고 정삼품(正三品)의 품계(品階)로 무과 최고위직(武科 最高位職)임.
 
3) 재신(宰臣:현재 장관/長官)의 요직을 두루 거쳐 수상(首相:현재 국무총리/國務總理)이 되었다.
정숙공은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武科로 출발하여 무과(武科) 최고위직인 상장군(上將軍)의 직위까지 승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武科)에서 동반 관직(東班官職)도 겸직하는 아주 유능한 인재로 등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장군(將軍)의 직책 때 지합문사 겸 어사중승(知閤門事 兼 御史中丞), 대장군(大將軍)의 직책 때 문하성(門下省)으로 보직을 옮겼으며 우승선(右承宣)에 이어 지병부사(知兵部事)를 겸직하였고 다시 좌승선 지이부사(左承宣 知吏部事)로 전보(轉補)되는 등 중앙 정부요직을 맡아 재신(宰臣)의 직책을 두루 맡았다. 
1287년(충렬왕13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용되어 드디어 재신(宰臣)이 되었으며 1292년(충렬왕18년) 56세 때 문하시중(門下侍中:현재 국무총리)에, 1295년(충렬왕21년) 1월, 첨의중찬(僉議中贊:首相)으로 임용되어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말과 같이 "위에는 임금 한 사람 뿐이고 아래에는 일만 명(모든 관직과 과 국민)의 우두머리"(一人之下 萬人之上)에 해당되는 수상(首相)이 되었다. <이때의 나이는 59세임.>
 
4) 기지(機智)를 발휘하는 담판(談判)능력과 탁월한 실리외교(實利外交)로 국익(國益)을 도모(圖謀)하고 국권을 수호(守護)하였다.
1275년(충렬왕1년) 장군의 직위에 있을 때 축하사절의 임무를 가지고 동지추밀원사 허공(同知樞密院事 許珙)과 함께 처음으로 원(元)나라에 들어갔다. 그 후 1277년에 순안공 모자(順安公 母子)의 사건에 대한 협의와 입조(入朝)를 요청하는 사절로, 1279년에는 전함(戰艦)을 수조(修造)하는 계획을 협의할 때 원(元) 나라 원수부(元帥府)에서 감독하지 않도록 협의하는 외교교섭을 위하여 원(元) 나라에 갔다. 당시 원(元) 나라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동진정책(東進政策)을 수립하고 고려에게 배(병선:兵船)를 만들고 병사(兵士)와 선원을 훈련시키도록 요청하면서 헌도(?斤都) 다구(茶丘) 등 감독관을 보내려하자 1280년(忠烈王6년) 11월 다시 원(元) 나라에 들어가 왕(王)을 정동성사(征東省事)로 김방경(金方慶)을 정동장수(征東將帥)의 칭호를 주어 다구(茶丘) 등의 전횡(專橫)과 원(元)의 간섭을 막을 수 있도록 元 나라 세조(世祖)의 동의를 받는 성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정숙공은 훌륭한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우승지(右承旨)의 직책으로 조서의 내용(詔旨)과 상사문자(上司文字)를 정확히 번역하여 하나의 잘못도 없이 정확히 전달하고 몽고어를 자유롭게 사용(驅使)할 수 있는 능력은 元나라와 외교교섭을 위하여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이 입증되었으며 아울러 원나라 사람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한편 원(元) 나라의 동진정책이 계속되어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육군(兵士), 해군(水軍), 선원, 군량, 선박 등 많은 군비(軍備)의 징발(徵發)을 계속 요구하자 다시 원(元)에 들어가 고려의 국력은 원(元)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등 해를 거듭하면서 협상을 계속하여 1283년 3월, 2년여의 외교교섭 끝에 드디어 원 세조(元 世祖)로부터 수량(數量)을 줄여도 좋다는 재량권(裁量權)을 얻는 큰 성과를 얻은 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년대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으나 (墓誌銘에는 越乙亥年으로 기재됨) 원(元)나라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私的 感情)으로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원 세조(元 世祖)에게 건의하여 세조(世祖)가 고치려하자 바로 원(元) 나라에 혼자 뛰어 들어가 세조(世祖)를 단독으로 만나 명쾌하게 설명하여 고치려던 계획을 중지시켰고, 서북에 위치한 2개의 지역(墓誌銘에는 南洲 北鄙로 기재되었음)을 다시 찾아 우리 영토로 환원시킨 것은 기민한 대응능력과 탁월한 협상역량의 결과로서 국가에 공헌한 큰 성과로 평가되었다. 이것을 묘지명(墓誌銘)의 표현을 인용하면 "정숙공은 움직이면 잘못을 바로 잡아주는 성과를 가져오고 만세에 빛나는 공적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위와 같이 당시 여.원(麗.元)관계의 어려운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드시 원(元) 나라에 파견되었으며 파견된 회수가 무려 30여회이다. 정숙공의 외교활동에 대하여 단편적인 내용을 서술하였으나 元나라 세조(世祖)와 대화를 나눌 때 항상 대동하던 통역관(대령총관 강수형:大寧摠管 康守衡)을 배석시키지 않고 단독으로 대화하여 칭찬 받은 능통한 몽고어와 탁월한 외교협상능력, 그리고 즉석에서 해결하는 기민한 대응능력(전대지재, 전대지공/專對之才, 專對之功)을 모두 갖춘 직업외교관의 재질을 마음껏 발휘하여 여. 원(麗. 元) 사이의 수많은 어려운 문제를 실리외교(實利外交)로 해결하고 국익(國益)을 도모하였다.
 
5) 조비 무고사건(趙妃 誣告事件)으로 구속(拘束)과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1292년(忠烈王18년) 왕자 원(?:뒤에 忠宣王)이 세자(世子)가 되면서 정숙공의 따님이 충선왕비(忠宣王妃/趙妃:이때 공주는 元나라 晉王의 딸로 계국대장 공주/?國大長公主임)가 되었다. 1298년(忠烈王 24년) 궁궐의 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조비(趙妃)를 모함하는 글을 써 붙여 정숙공과, 부인 그리고 조비를 포함하여 자녀와 사위까지 모든 가족이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특히 조비의 어머니는 참혹한 국문(鞫問)이 극에 달하여 거짓 자백하는 사태에 이르렀고 모든 가산도 몰수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 원로이며 수상인 정숙공은 1298년부터 7년 동안 안서(元나라의 安西)에서 쓰라린 유배(流配)생활의 수모를 당하였다.
조비 무고사건(趙妃 誣告事件)은 조비(趙妃)의 어머니가 무당을 이용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말고 조비(趙妃)를 사랑하도록 저주(詛呪)한다는 내용의 글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궁궐의 문에 써 붙인 사건이며 뒤에 방(榜)을 써 붙인 사람은 사재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周) 의 행위로 밝혀졌음.
 
6)유배이전(流配以前)의 권리와 지위를 회복하여 평양군(平壤君)의 작위(爵位)와 공신칭호(功臣稱號)를 받고 화려하게 재기(再起)하였다
1305년(忠烈王31年)에 구금과 유배에서 풀려 고려(高麗)로 돌아오자 바로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로 임용되고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의 칭호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平壤君)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그리고 정숙공을 위하여 별도의 행정기구를 만들어 직원을 배치하는 한편 承旨 김지겸(金之兼)이 왕에게 "조인규(趙仁規)는 나이도 많고 덕이 높아 국가의 원로로서 조회에 참석할 때 옥대(玉帶)를 매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궁궐(宮闕)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첨의밀직(僉議密直) 한 사람을 집으로 보내어 자문을 받으며 만약 인규(仁規)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법을 어긴 것으로 본다."라고 건의한 내용을 왕이 승인하여 드디어 유배의 수모에서 벗어나 화려하게 재기하고 위와 같은 최고의 영예와 최대의 특전(開府置官의 榮譽와 贊拜不名 劒履上殿의 特典)을 누렸다. 
 
7) 자손에게 교훈(敎訓)의 말씀과 글을 남기고 조용히 서거(逝去)하였다.
가) 자녀들에게 훈계(訓戒)한 말씀과 글
정숙공은 서거(逝去)전에 병(病)을 시중들던 둘째아들 련(璉)에게 “너희들 형제자매 아홉 사람은 서로가 분쟁을 일으켜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먼저 자기 집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형제가 원나라에서 돌아오면 다같이 교훈으로 하여 영원히 집안의 법(가법:家法)으로 하라”는 말씀(주:1 참조)과 자녀를 훈계한 다음의 글(주:2 참조)은 후손들이 가훈(家訓)으로 잘 지켜야 할 것이다.(주:2 참조)

[주:1] 高麗史 卷105 列傳18 趙仁規傳 : ― 前略 ―
謂曰 汝家兄弟姉妹且九人 愼勿忿爭 取笑於人 待汝昆季來 具訓之 永爲家法 
[주:2] 
계자시/시제자(戒子詩/示諸子)의 기록(記錄)과 내용 (原典의 사본은 부록 8항 참조) 
① 1723년 계묘보 정숙공 행적 란(癸卯譜 貞肅公 行蹟欄)에 아래와 같이 게재되었음
前略 ― 公 嘗以詩 戒子曰 <<事君當盡忠 與人當盡誠 願言勤夙夜 無?爾所生>> 出東文選
②1916. 7. 5 조선고서간행회 발행 동문선(朝鮮古書刊行會 發行 東文選)
19권 349 - 350면 오언절구(五言絶句)편 시제자(示諸子) 
<<事君當盡忠 遇物當至誠 願言勤夙夜 無?爾所生>> 
③ 1478년 조선 성종9년 2. 28: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내용(130권 중 19권) 8책 19권 오언절구(五言絶句)편 시제자(示諸子)
<<事君當盡忠 遇物當至誠 願言勤夙夜 無?爾所生>>

나) 1308년 4월 25일 의연(毅然)한 자세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逝去하였다).
정숙공이 병(病)이 들어 아들과 사위들이 의원을 불러 치료하려하자 "내가 관직이 최고위직에 있었고 나이가 7순(七旬)을 넘겼으며 죽고 사는 것이 명(命)이 있는데 의사를 부를 이유가 없다" (주:1 참조)라고 반대한 다음 위항에 기술한 유훈(遺訓:家法)을 남기고 목욕을 마친 다음 옷을 갈아입은 후 서쪽을 향하여 꿀어 앉아 향노(香爐)를 받들고 부처의 공덕을 찬미(讚佛)한 다음 단정히 앉아 죽음을 맞았다(逝去하였다 - 주:2 참조). 이 때가 1308년 4월 25일(忠烈王34年 戊申 夏四月 癸丑)이며 나이는 72세(享年 72歲)이다. 한편 서거(逝去) 소식을 들은 성안(城中)의 시민들이 급히 달려와 절을 하고 슬퍼하면서 공직을 바르게 수행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였으며 임금도 탄식을 하면서 조문사절을 보내고 장례에 대한 일을 도와 6월 28일 개성 웅곡 북쪽기슭(開城 熊谷 北麓)에 장례를 치르게 한 후 시호(諡號)를 貞肅公으로 내렸다.

[주:1] 
高麗史 卷105 列傳18 趙仁規傳 
― 前略 ― 及?疾 子壻迎醫診視仁規曰 吾發跡行伍 官至極品 年踰七旬 死生有命 安用 醫爲 ― 下略 ― 
[주:2]
充史館 修撰官 方于宣 撰 貞肅公 墓誌銘 :
― 前略 ― 言訖 洗浴更衣至昏時 向西胡? 奉香爐 念讚佛古偈 端坐而逝 ― 下略 ―
 
8) 후손(後孫)에게 위업(偉業)을 남겨주었다.
첫째 : 관향(貫鄕)을 평양(平壤)으로 정하는 주체가 되어 본관(本貫)을 만들어 주었다.
둘째 : 정숙공이 공신의 칭호와 함께 평양군의 작위를 받은 후 명문거족(재상지종 : 宰相之宗 15귀족)으로 도약하여 조문(趙門)의 지체를 높여 주었다. 

※ 정숙공(貞肅公)의 실리추구 외교활동(實利追求 外交活動)이 원(元)나라에 기울어졌다는 비판적 시각(批判的 視角)에 대한 견해(見解)
① 고려의 국내 정세와 元나라와의 관계는 복잡 미묘(微妙)하였다.
먼저 고려와 원나라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고려는 1258년(고종45년)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고려의 세자 ?(후에 원종)이 몽고로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평화관계 수립을 약속한 후 고려와 몽고사이에는 복잡한 외교교섭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충선왕도 이미 원나라 왕실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였다.
② 원나라는 세력 확장을 위하여 동진정책(東進政策)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1280년(충렬왕6년)대에 들어와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원나라는 일본 정벌을 계획하고 병력, 함선, 군량 등 일본공격을 위한 군사적 지원(軍費支援)을 계속 요구하고 고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특히 고려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사항을 조정하기 위한 외교교섭에 온 힘을 기우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③ 국력이 약한 고려는 실리외교 협상이 국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일본 공격을 위한 군비지원은 2년여의 지루한 외교교섭으로 元 세조로부터 재량권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세력이 강한 元나라는 고려에 항상 부담을 주는 문제가 이어지고 있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30여회에 걸쳐 元 나라에 들어가 협상을 벌였고 때로는 원 세조(元 世祖)와 단독으로 직접 담판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군비 지원(軍費 支援)을 요청할 때 감독관을 파견하려하자 김방경(金方慶)에게 정동행성 원수(征東行省 元帥)의 칭호를 주도록 하여 감독관 파견을 중지시켰으며, 元나라사람이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원 세조(元 世祖)에게 고려 풍속을 고치라는 건의를 받고 고치려 하자 혼자 뛰어 들어가 세조(世祖)와 담판하여 이를 취소시켰고 그리고 서북 2개 지역의 영토도 되찾는 외교역량을 발휘한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왕정시대나 현대 산업 국가를 가리지 않고 힘의 뒷받침이 없는 국가, 다시 말하여 강대국의 논리에 약소국이 국권(國權)을 지키는 길은 치밀한 외교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나라의 요구를 최소화하고 고려의 국권을 유지시킨 것은 오로지 외교력이라고 평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정숙공의 실리를 추구한 외교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하여 묻고 싶다. 어찌하여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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