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世 세걸(世傑)의 아들로 휘(諱)는 수(脩), 자(字)는 선장(善長)이다. 어렸을 때 대사헌(從二品) 세걸이 효친, 충군, 경인, 애물, 등의 글자를 대쪽에 써서 주었더니 이것을 허리에 차고 외우고 익히면서 아버지의 훈계를 공경하여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8세에 경서를 읽고 크면서 용맹과 힘이 뛰어나 1697년 무과에 올라 안으로 선전관, 비변사랑청, 사복시내승, 훈련원주부, 판관, 도총도사, 경력 어영천총, 금군장, 총융중군(從二品)을 지내고 밖으로 황해병우후, 홍주영장, 하동, 중화, 철원부사, 안성군수, 황해병사(從二品)를 역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 자기 집 곡식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 여러 고을을 다스렸어도 자신을 위한 경영을 아니 하였고 주택이 누추하고 좁아서 집안사람들이 수리할 것을 권하니 “비바람을 가리면 족하지 어찌 화려한 것을 취 하리오 다만 자손의 현철(賢哲)을 원할 뿐이다” 하고 예의로 선비를 대하고 아전을 단속하여 먼저 민폐를 없앴으며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와 사람을 대하고 행동하는 절차를 권하며 장려하니 이 기풍이 활발히 일어나는 효과가 있어 그곳에 있는 아전과 백성이 모두 그 은혜를 칭송하여 돌을 깎아 비를 세우고 초상화를 그려 산 사당을 세웠다. 안으로 행실이 독실하여 벼슬의 진퇴와 계급의 상하를 상관하지 않고 뇌물로 이익을 도모하고 비굴한 태도로 아첨하는 자를 보면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 같이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재상의 집 문안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였다. 음. 양. 성. 역(陰. 陽. 星. 歷) 모든 술서(術書)에 통하고 더욱 병서, 산수(兵書, 算數)에 능하였으나 세상에 아는 자가 적어 벼슬이 겨우 군수, 병사로 1727년 향년55세로 여주목사 임소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부인 안동김씨와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화양동 선영하에 합장 하였으며 막내아들 진태의 높은 벼슬로 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