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世 중진(重晉)의 아들로 휘(諱)는 우(佑)이고 字는 약보(約甫)다. 충효(忠孝)로 이름 있는 집에서 출생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는 정성이 보통아이와는 달라 맛있는 음식이나 과실을 얻으면 부모에게 드리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순하였으며 부지런하였다. 9세 때 어머니께서 산후 여독으로 병석에 있을 때에 어느 의원이 난치병에는 풍어 고기를 쓰면 좋다하였으나 엄동설한이라 구할 수가 없어 손수 큰 냇가에 가서 사방을 방황하던 중 홀연히 물오리 한 떼가 날아서 돌다가 생선 한 마리를 떨어뜨리고 갔는데 그것이 풍어였다. 즉시 가지고 돌아와 고아드려 다소의 차도를 보았다. 어찌 효성에 감동함이 아니겠는가. 수명의 장단은 모를 일이다. 애석하게도 쾌유(快癒)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公은 나이가 어리어 친척들이 가엽게 여겼으며, 땅을 치며 슬프게 통곡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고 행인이나 과객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는 겨울인지라 옷을 입어 몸이 따뜻하면 돌아가신 분의생각이 나서 옷을 입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고 30년의 생활을 하루같이 지냈다. 예전에는 훌륭한 효자들은 모두가 이름을 밝혔는데 어찌 公만이 홀로 이름이 희미하니 이는 모두 자손들이 가난하고 사리를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니 한탄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