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世 유(猷)의 셋째 아들로 휘(諱)는 세발(世發)이고 字는 자장(子章)이며 남양(南陽)집에서 태어났다. 용모와 풍채가 뛰어났으며 사물의 판단처리가 명석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稱讚)이 자자하였다. 성장과정에 이미 문장이 숙성하여 문사(文辭)에 뛰어나고 서법(書法)도 탁월하여 송설체(松雪?)를 닮아 칠월 편을 썼는데 진본과 다름이 없어 세상 사람이 모두 보배처럼 여겼다. 14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어른같이 슬퍼하고 모친상을 당하여서도 제복을 벗지 아니하여 눈물에 옷이 젖을 정도로 애통해 하였으며 쇠약하여 병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내 1680년 탈상 전에 29세의 나이로 별세하니 배(配) 여흥 민 씨는 옷을 갈아입지 않을 뿐 아니라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서 대상 날 동서에게 내 뜻을 결정하였다 말하고 10여일이나 단식하고 애통해 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니 공은 효를 위하여 일신을 바치고 부인은 부도를 다하여 또한 일신을 바치시니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묘소는 김포시 군내면 감정리에 합장하였다.
공이 별세 후 아우 부사공(지방관직) 世成의 친자 경(儆)을 양자하여 그의 공으로 호조판서(正二品)를 증직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