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世 대진(大進)의 큰 아들로서 자는 사윤(士閏), 휘(諱)는 감(?)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학업에 열중하여 경(經) 문(文) 율(律)에 능하고 예의를 잘 지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19세 때에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며 충신을 몰아내는 등의 불륜(不倫)을 바로잡기 위하여 몸을 던져 항소(抗疏)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 청나라 군대가 침입한 난) 이 일어나자 어버이를 모시고 “만뢰성”(萬賴城)에 피난하였고 성내 본현(本縣)은 물론 안성, 양성, 직산, 평택, 목천 등지에서 온 피난 자가 수천이었다.
公은 무질서한 장정들에게 나무를 베어 방패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게 하고 약한 자와 부녀자들에게는 돌을 주워 오라하여 석축을 쌓게 하며 목책(木柵)을 둘러치고 적을 막는데 대비하는 일에 군중들은 의장(義將) 뜻에 복종하였다. 하루는 청나라 군대 수천이 성에 돌입 하였으나 적병 450명을 사살하였으며 그 이튿날에는 전일의 배가되었다. 이런 싸움이 4~5일이 지난 후 성내 외(城內 外)의 나무숲에 적이 불을 질러 연기와 불기둥이 성내로 치솟자 의장은 하늘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기원하였던바 큰바람이 스스로 일어 성 아래로 내려가므로 연기는 적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고 소낙비가 쏟아져 불길이 잡혔으며 많은 사람을 구하게 되었다. 1637년에 부친께서 피난소에서 별세하자 예절에 맞추어 장례를 행하고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죽으로 연명하며 묘막살이를 하였으니 그 효성이 출중함을 알 수 있다. 난이 끝나자 화를 면한 피난소에서 공의 덕과 용기를 글로써 나라에 바쳐 포상하고자하니 “죽을힘을 다 하여 싸운 분들에게 공이 있지 어찌 나에게 있으리오.” 하며 듣지 않았다.
또한 공께서 의사(義士) 300명을 모아 남한산성에 가는 도중 그 성은 이미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주야 통곡하였다 한다. 충효의 큰 절개를 다하여 백세의 스승이 되었고 3전 3승하여 민중을 살렸으니 그 지혜가 더욱 빛나 큰 장군이라 불리었다.
공은 1689년(숙종 15년) 86세로 생을 마쳤으며 1852년(철종 3년)에 백곡면의 죽계사(竹溪祠)에 봉안하였으나 1871년(고종 9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폐향(廢享)되어 1949년 10월 24일 진천의 김유신장군 사우(祠宇)인 길상사(吉祥祠)에 배향하였고 1962년 1월 28일 지방유림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에 “만뢰사”(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29번지)를 재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9월초 정일(丁日)에 지방의 유림 및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묘는 충남 천안시 북면 운용리(군단리) 산 89번지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