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世 정익(廷翼)의 아들로 휘(諱)는 유(猷)이고 자(字)는 여헌(汝獻)이며 하성 원산에서 태어났다. 8세 때 기이한 선비를 만나 상(相)을 보이니 만 리를 떠돌아 다녀도 고국에 돌아와 대장이 될 사람이라 하였다.
나이 10세에 小學과 四書를 읽어 대의(大意)를 능히 알고 시사(詩史)를 널리 보아서 문사(文詞)가 날로 성취되었다.
1644년(仁祖 22年)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부사(筮仕) 쇄문표신(?門標信)을 받고, 대궐문을 걸었는데 지각한 당직교리(堂直校理) 한사람이 강력히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자물쇠를 내리니 그의 동료들이 무관으로서 문관에게 항거하였다 하여 논책(論責)하였다. 왕께서 미행하여 보시고 선전관은 법을 지켰으니 육품관(六品官)에 올려 옮기고 교리를 파직하라 하였다. 그 후 훈련주부(訓練主簿)로 발탁(拔躍)되고, 1649년(仁祖 27年) 판관첨정(判官僉正)을 거쳐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치적을 쌓았다. 1654년(孝宗 5年) 비국랑(備局郞)이 되고, 바로 평해군수(平海郡守)로 선정(善政) 어사포계(御使?啓)로 영장(營將 : 지방장교)으로 발탁되어 청주(淸州), 홍주(洪州)에서 치병(治兵)이 탁월(卓越)하여, 어영천총금군장(御營千摠禁軍將)이 되고, 1658년(孝宗 9年) 영변부사(寧?府使)로, 1661년(顯宗 2年)에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되고, 그 후 행수선전관 겸 능마당상관(行首宣傳官 兼 能摩堂上官)을 거쳐 어영중군(御營中軍)을 역임, 1663년(顯宗 4年) 여름 경기수사 겸 삼도통어사(京畿水使 兼 三道統禦使)에 임명되고, 그 장재(將材)에 치적을 목격한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양 대신이 공(公)을 원수(元帥)로 임금께 추천하였으나, 한질(寒疾)로 병환중에 북병영조련기일(北兵營調練期日)이 박두하여, 병으로 연기하라 권함에도 뿌리고, “내 평생에 진충순국(盡忠殉國)이 소원인데 신병으로 연기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하며 병영으로 달리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1665년 3월 10일 향년 45세로 순직하니 도민(道民)이 천도(天道)가 무심하여 국가의 동량을 일찍 잃었다하여 탄식하였다.
묘소는 청양군 남양면 온직리 산 9번지 酉坐에 모셔졌고, 동소 싸리티 대 181번지 숭모사(崇慕祠)에서 매년 11월 둘째 일요일 시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