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世 인(寅)의 장남으로 자는 익지(翼之) 호는 낙도재(樂道齋)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머리가 좋았으며 거동이 출중하여 재주나 기운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고 젊었을 때 과정(科庭)에 나가서는 초시 복시 전시 등 삼장에서 연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옛 사람들의 큰 절개를 흠모하고 책이나 읽고 시나 읊조리는 선비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독실하세 배우고 힘써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스스로 호를 낙도재라 하였다.
효성이 지극해서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는 형제들과 함께 산소 옆에 궤연을 모시고 묽은 죽만 마시며 3년 동안 여막에서 시묘하며 조석상식을 올렸다. 인조는 공의 효성과 우애를 아름답게 여겨 물건을 내리어 포장(褒?)하였다. 1636년(인조 14년)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종묘사직이 있는 강화로 갔으나 갑곶이(甲津)가 이미 함락되었는지라 공이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의 집안으로 평생 읽은 글도 바로 오늘 같은 날을 위한 것이라” 하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려하니 부인 이 씨가 그 칼을 빼앗아 먼저 자결하였다. 공이 그 염을 마치고 날 즈음 적병이 공의 행동거지가 재상의 기품이 있다고 하며 핍박하는지라 공이 크게 꾸짖었으니 적병이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때리고 활을 쏘니 공이 마니산아래 절벽으로 몸을 던져 자결하였는데 공의 나이 겨우 39세 때였다.
난리가 멈춘 뒤 두 동생이 공의 시신을 찾아 상처를 살펴보니 5~6개의 화살이 박혀있는지라 화살을 뽑고, 내외분을 1638년 4월에 원산리 산 2번지 간좌에 합장으로 모셨다.
조정에서는 배(配) 이씨에게는 정려(旌閭)를 명하여 공의 묘소 입구에 건립하였다.
공에게는 집의(執義)벼슬을 증직하였고, 1726년 영조(英祖)는 특명으로 좌승지를 증직하였다.
그 후 1796년 봄 정조(正祖)는 인조 년대(仁祖 年代)의 공의 충의로운 충절에 감탄하여 특명으로 정경(正卿)을 가증(加增)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 시호를 충숙(忠肅)으로 내렸다. 묘소아래 경조사(敬祖祠)에서 매년 11월 1일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