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世 전의령(典儀令) 사겸(思謙)의 큰아들로 고려 말과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평양부 사람으로 자(字)는 안석(安石) 호는 우형(雨亨)이다.
박(璞)은 재주가 뛰어나 1376년 문과 동건사(同建士)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삼사좌사(三司佐使: 三司의 正二品)에 이르렀다. 이방원(李芳遠)과 동서 간으로 태조를 따르면서 잘 섬겼다. 정몽주가 조박을 청주목사(외직正三品)로 보냈다가 후에 수원부로 올려 해(害)하려 하였으나 조박이 망명하여 화를 면하였다.
태조가 개국의 공을 논하며 예조정서(판서.장관)를 전수하였고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참찬문화부사(參贊門下府使)로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올랐으며 11월에 지경연사(正二品)로서 경연(經筵)에서 대학을 강론하고 12월에 대사헌(從二品)으로서 조정승 조준(趙浚), 정당문학 하륜(河崙), 중추원학사 이첨(李詹), 봉상시소경(奉嘗試少卿) 정이오(鄭以吾) 좌간의대부 조용(趙庸)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술하였다.
1399년(정조1년) 정원(政院)의 지경연사로서 경연에서 입시할 것을 주장하였고 3월에 대사헌으로서 조준과 함께 집현전 제조관이 되었다.
양광도(지금의 충청도)를 안렴(按廉:민정을 잘 보살핌)하고 전라 경상도를 관찰(시찰)하고 서북 면을 순문(巡問)하였는데 처결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모두가 칭찬하였다.
53세에 작고하니 시호는 문평공(文平公)이다.
묘소는 실전되어 찾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