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世 덕유(德裕)의 여섯 아들 중 여섯째로 고려 말 문신이다. 처음의 휘(諱)는 윤(胤), 자(字)는 거경(巨卿), 호(號)는 송산(松山), 시호(諡號)는 평간공(平簡公)이다. 어머니는 고창오씨(高敞吳氏)로 첨의평리(僉議評理) 영익공 의(榮益公 誼)의 딸이다. 형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준(浚)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상장군 개국공신, 평성부원군 등을 제수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조선중기 이후의 여러 사서(史書)에 의하면 고려 지신사(知申事)로 있을 때 굳은 지조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의 외직(外職)을 맡게 하고 조선태조가 개국하자 통곡하며 두류산(頭流山:지금의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름을 견(?), 자(字)를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개국 초에 태조가 절개를 찬양하고 재능을 아껴서 호조전서(戶曹典書)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청계산으로 은거하여 망경대(望京臺)에 자주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왕굴”에 내려가 샘물로 갈증을 달랬다고 하며, 상봉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그곳에 올라 개경(開京)을 바라보았다하여 세인들이 만경봉(萬景峰)을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형인 조준을 대동하고 청계산에 들어가 옛 친구 사이로 마주 앉아서 새 조정에 나와 도와주기를 간청했지만 굳은 절의(節義)를 돌이키지 못하였고, 청계산 일대를 봉지(封地)로 내린 후 석실(石室)을 지어 그의 정절을 기리라 하였다고 전해지며, 석실 터는 현 “청계사” 입구 원통동(圓通洞)에 있다. 그러나 신왕(新王)이 지은 석실에 살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바로 양주 수락산 기슭으로 은거하자 뜻을 같이하던 절신들이 그곳으로 모여 살다가 1425년(세종 7년)에 75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니 후세에 그분이 살던 곳을 “송산”이라 부르고 그 터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묘소는 성남시 여수동(麗水洞) 산 30번지에 예장(禮葬)되고 묘비에 고려관직만 쓰라는 유훈(遺訓)을 남겼으나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을 넣었다가 천둥번개가 내리쳐서 “조공지묘(趙公之墓)”만 남겨 후손들에게 충절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3대(代)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현손 부(溥)가 문부제학(文副提學)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에 부임하기 위하여 산소에 소분(掃墳)하러 갔다가 즉사한 일도 있고, 또 두 아들의 이름을 석산(石山)과 철산(鐵山)으로 바꾸어 지조를 지키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정선택주 파평윤씨(貞善宅主 坡平尹氏)로 공의 묘계(墓階)에 부장(附葬)되었다. 자손의 묘도 함께 있어 여말과 조선 초의 묘제문화를 한눈으로 볼 수 있어 성남시에서는 이 묘역을 2001년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밖에 모셔져 있는 사적으로는 양주의 정절사(旌節祠 : 사천서원/沙川書院), 의정부의 송산사(松山祠:경기도 문화재 제42호), 공주의 송산사우(松山祠宇: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8호)등이 있다.
또한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에서 고려역사문화 재현의 표상으로 파주시 통일동산에 건립한 “고려 통일대전 충신각”에도 표절인물(表節人物)로 차자인 철산(鐵山)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