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世 정숙공 인규의 다섯째 아들로 자(字)는 계보(季寶) 고려말 문신이며, 9살 때 문음(門蔭)으로 창희궁 권무가 되고 승진을 거듭하여 대호군이 되었다. 충선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 충숙왕 때 언부총랑 전서(言獻部摠郞 典書)가 되었다. 충숙왕과 심양왕 고가 틈이 생겼을 때 어떤 이가 위를 이간하여 원윤에 제수되어 한지에 나가 있더니 일이 끝남에 왕은 위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고 지밀직을 시켰다가 뒤에 판밀직(判密直)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올라 평양군에 봉해졌다.
1332년 (충혜왕 2년)에 방문객과 사사로이 국사를 비방 하였다는 무고로 왕이 노해서 복주목(福州牧)으로 폄출(貶出)하여 급히 가기를 독촉하니 위(瑋)가 창황히 달려가 부임하고 이 일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었다. 충목왕 3년에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듬해에 졸하니 수 62세였다. 충숙왕이 정사에 소홀하여 정치를 재상에게 맡기니 위는 힘써 대체를 생각하고 사소한 일은 돌보지 않으며 그 말이 강직하니 사람들이 감복하여 아버지의 풍도가 있다고 하였다.
묘소는 송림원이란 기록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고 매년 10월3일에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