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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발자취

역사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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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水原 華城)과 무의공(武毅公)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화성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인 조선 제22대 정조대왕 때 축성된 성곽이다. 평양조씨 19세世 조심태(趙心泰)공이 축성 총책임관으로 있으면서 쌓은 성이기 때문에 우리 평양조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이다.

조심태(1740~1799 <승> 都摠管:正二品)는 평양조씨 18世 경(儆)의 네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자는 집중(執中)이며 시호는 무의공(武毅公)이다.

처음 부모의 음덕으로 선전관(宣傳官)으로 출발하여 내승부정(內乘副正), 훈정별군직 (訓正別軍職), 도정(都正), 승지(承旨), 금별훈중좌우포장(禁別訓中左右捕將), 총융사(摠戎使), 병형공참판(兵刑工參判), 한성좌우판윤 (漢城左右判尹), 同 의금어영훈련대장 (義禁御營訓練大將), 장용위내외정 (壯勇衛內外正)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 공형조판서 (工刑曹判書), 지의금(知義禁)과 외직으로 수원유수(水原留守) 外除 용천, 부영, 수원, 선천부사(龍川, 富寧, 水原, 宣川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충청수사, 병사(忠淸水使, 兵使), 황해북병사 (黃海北兵使), 통어사 제사(統禦使 制使) 등의 많은 벼슬을 지냈다.

공의 업적 중 역사에 기리 빛날 일은 무엇보다 수원 화성을 축성한 일이다. 화성의 축성은 지금으로부터 약 210여 년 전인 1793년 2월 28일을 기해 팔달, 장안 두 대문과 북수, 남수 두 수문 건립을 위한 터 닦기 공사와 하천의 물 돌림부터 시작되어 2년 7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에 완성되었다. 화성은 장대한 규모로서 우리나라의 축성 사상 하나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1997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와 같은 고성 즉 화려한 화성을 성축함에 있어서 정조께서는 특별히 신임하시는 당시 훈련대장인 공을 이 공사를 직접 지휘 감독하는 감동당상(監董堂上:監督監) 으로 임명하고 수원유수(1794년 2월~1797년 7월까지)직도 겸하게 하였다. 이는 곧 우리 문중의 명예스러운 영광이 아닐 수 없으며 후세까지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자랑스러운 일이다.

화성의 축성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성의 성격이나 국방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현릉원 (사도세자의 묘소)의 원침과 행궁(임시로 왕이 머무는 별궁)을 수호하는데 보다 큰 목적이 있다하겠으며 또한 정조왕권의 강력한 강화와 상징물로서도 중요한 연계를 지녔다고 하겠다.

화성 축성 약 5년 전인 정조 13년 7월 11일, 국왕은 오랜 숙고 끝에 숙원이던 생부 사도세자의 묘원을 수원 구읍치의 주산으로서 좌정한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형국으로 풍수상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으로 결정하고 천장할 것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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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희 2020.02.26 19:32
    이렇게 훌륭하신분의 묘소를 어쩌면 이렇게 소홀하게 내팽개치듯 버려 두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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