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계서원(雲溪書院)과 용문선생(龍門先生)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 4-2번지에 운계서원(雲溪書院:경기도 문화재자료 18호로 1983. 9. 19.지정)이 있다.
운계서원은 1594년(선조 27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덕촌리 운계부락에 운계사우(雲溪祠宇)로 처음 창건되었다. 1714년(숙종 40년)에 왕명으로 용문선생 조욱(趙昱:1498~1557 <正> 贈,이조판서. 正二品) 공에게 용문서원(龍門書院)으로 사액치제(賜額致祭)되었다. 그 후 헌종(憲宗 1835~1849)께서 친히 용문서원에 임어(臨御)하여 운계서원이라고 서원 명을 바꾸게 하였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 섭정 시 그의 명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932년(왜정)에 양평군의 유림과 용문선생의 본손(本孫)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공은 평양조씨 13世 수함(守함)의 차남으로 자는 경양(景陽)이며 호는 세심당(洗心堂)이다. 세칭 용문선생이며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질과 영민한 기품이 있어 글을 배움에 남다른 재능과 소질이 있었다. 또한 시구(詩句)를 짓게 되면 시어(詩語)가 빼어나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강에서 일대 문사(文士)들이 모여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이때 공께서는 “청산면면입(靑山面面立) 한강유유하(漢江悠悠下) 아양산수간(峨洋山水間) 수시지음자(誰是知音者)” 즉 “푸른 산은 군데군데 서 있고/한강 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네./산수 간에 뜻을 두고 아양곡을 타노니/나의 포부를 알아줄 이 그 누구일까!”라는 시를 지어 좌중이 모두 경탄했다.
공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는 구도(求道)에 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공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에게 글을 배웠는데 중종14년(1519년) 을묘사화(乙卯士禍:간신들이 조광조를 위시한 여러 선비들을 모함하여 투옥시킨 사건) 때 문생(門生)에 연좌(連坐)되어 조정암과 함께 수감되었으나 나이가 가장 어리다( 당시 나이 22세)는 이유로 풀려나 화(禍)를 면했다.
공께서 가르침을 받고 따르던 두 명현(趙光祖와 金老泉)이 죽자 공은 형님인 양심당(養心堂) 성(晟)과 함께 삭영(漣川郡)으로가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도학(道學) 연구에 열중하였다.
공은 담담한 마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를 싫어했으나 모친의 권유로 한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정대(庭對:임금의 하문에 답변하는 최종의 면접구술시험)에서 <기묘명현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불합격 처리되었다. 이때부터 모친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려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나 그 후 당금(黨禁)이 풀리자 조정의 천거와 모친의 재차 권유로 잠시 관직에 나갔다가 모친께서 별세하자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용문산중에 거지(居地)를 정하고 그 동네를 둔촌동(遁村洞)이라 이름 짓고 그 집을 세심당(洗心堂)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공을 용문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심당으로 배우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들에게 경서(經書)의 지의(旨義)를 강론(講論)하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명종(明宗)이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전교(傳敎)를 내리자 조정에서 공의 덕행을 천거하자 명종의 특명으로 선무랑(宣務郞) 내섬시(內贍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그 후 외직인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다. 1554년(명종 10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거진(巨鎭)을 함락 시킬 때 우리의 주장(主將)을 설득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왜구가 물러가자 곧 사직하고 다시 용문산아래 옛 은거지로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후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유벽(幽僻)을 찾아가니 구름 속에 집이로다. 산채(山菜)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 노라. 이 몸이 강산(江山) 풍월(風月)과 함께 늙자 하노라<조욱>” 공께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웅지를 접고 유벽한 곳을 찾아 후학을 기르신 대학자다운 시라 하겠다.
공은 1557년(명종 12년)에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공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공의 시문집(詩文集)이 열권이나 되고 언행록도 한 권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돼 이제 남은 것은 절구(絶句) 몇 수에 불과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운계서원에는 조 용문선생 욱(昱)을 주벽으로 그의 형님이신 양심당 성(晟)과 귤우정(橘宇亭) 신변(申변) 등, 이렇게 세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다가 후에 용문선생의 손자 둔곡선생(遯谷先生) 형생(亨生)과 증손자 둔촌선생(遁村先生) 문형(門衡) 등 다섯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유림주관으로 매년 추향봉제(秋享奉祭)를 올리고 있다.
세심당. 을묘사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