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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발자취

역사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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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杜門洞) 72현(賢)과 송산공 부자(松山公 父子)

개성의 송악산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내린 중등에 현릉(태조왕릉)이 있고 그 서남으로 깊숙한 골이 두문동인데 만월대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고려 말 중국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요동정벌에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이성계가 국경을 넘지 않고 회군하여 혁명을 일으켜 수창궁에서 왕좌에 올랐다.

이태조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한편으로 민심을 무마하고 새로운 인재를 선발코자 친히 경덕궁에 나아가 과거를 열었으나 선비들은 집단으로 입장하지 않고 서쪽 고개를 넘어 나뭇가지에 갓(冠)을 걸어두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부조현(不朝峴)은 등조(登朝)하지 않는 고개이고 괘관현(掛冠峴)은 자기가 쓴 갓을 나뭇가지에 걸어 둔 고개이니 이 두 고개를 넘은 선비들은 새 왕조에 벼슬도 협력도 하지 않겠다는 집단 항의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이태조는 거듭 세 번이나 과거를 열었으나 선비들을 돌아오지 않았다. 태조는 대노(大怒)하여 100년 동안 송도인들에게 정거(停擧)한다는 금고령을 내렸다.(성종 5년:1474년에 해제함)

이성계, 이방원 부자가 고려의 우왕과 창왕 그리고 공양왕의 세 임금을 모조리 살해하고 힘에 의한 국권 탈취에 집단으로 저항한 고려의 유신이요 학사(學士)인 조의생, 임선미, 고천상, 서중보 등 여러 선비들은 새 왕조의 끈덕진 회유와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저항하다가 이방원(太宗)이 지휘하는 사병(私兵)들에게 참살당하여 처절하게 죽었다. 그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 의 충절을 지키고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으며 바르고 고고(孤高)한 선비의 도를 지켰다. 이들 두문동 인사들은 반정(反政)운동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고 부도덕한 신왕조에 불복하던 도야(都野)인사들의 지지와 가세로 민심이 크게 동요하니 혁명세력은 위기에 몰리어 강압책으로 탄압을 계속하였고 결국 고려유신들은 망명, 자살, 은둔으로 세상을 등졌던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조선후기 유생들 교과서)은 이렇게 써 놓았다. “고려가 망한 후 명문자제들은 벼슬을 싫어하고 집안에 들어 앉아 죽음으로 지조를 지켰으니 그 자폐현상을 지금에 두문동이라 한다.” 또 “부녀들이 거리에 나설 때는 얼굴을 가리고 화사한 몸단장을 아니 하며 소박하게 정결을 지키니 그 풍속이 지금에 이른다.”고 했다.

두문동 72현은 오직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할 뿐 조선개국에 불복(不服)한 인사들로서 대의명분(大義名分)에 투철하여 살해, 자살, 망명, 하야한 고려 유신들을 대표한 분들이다. 고려 왕조실록이 오늘에 한권도 전하는 것이 없고 만월대의 주춧돌도 성한 것 없이 모조리 파괴되었음을 보면 두문동 72현이 얼마나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또 전하는 사적이 없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문동 72현을 조정에서 공식으로 천양하기는 360여년 후인 영조 27년에 개성의 부조현에 72충신을 새긴 비를 세우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술함으로써 정사로 추인하였으니 그들은 비로소 신왕조의 면죄부를 얻게 되었고 후손들은 충신의 가문임을 떳떳이 자랑하게 되었다. 이 부조현 비문에 오른 72현의 이름이 규장각 충렬록에 비치되어 [조선사략 하 3권]에 전하고 있는데 그 출전(出典)은 그 당시의 시기(時記)로 비전(秘傳)해 오는 정승인 구송은(松隱鴻) 체다의당(多義堂. 貴河) 임두문제(杜門齊. 先味) 이기우자(행) 제가의 유집을 참고한 듯하다. 그 중에 대제학을 역임한 기우자 이행 선생의 문집 2권에 있는 [두문 72현록]이 대표작이 될 만하기에 다음에 적는다.

[주] [고려말에 충신으로 충절을 지켜 의리에 죽은 분이 많았으며 그밖에 산야에 은거하여 문을 닫고 자취를 숨겨 혹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혹 정절을 스스로 지킨 분들을 통칭하여 두문동 72현이라 하는데 대개 그 의리가 같음을 말하는 것이고 송경에서 함께 은거함만을 말한 것을 아니다.]라고 72현의 선정기준을 밝혀 놓았다.

<두문 72현> 정몽주 김 주 이존오 정 추 최 양 길 재 남을진 임선이
원천석 조의생 맹 유 도 웅 이사지 도동명 김자수 장안세
정 광 국 유 한철중 나천서 성 부 이명성 이 색 정 지
하자종 이양중 김진양 안 성 이사경 조충숙 허 징 최문한

서 견 신덕린 맹희덕(맹희도) 김약항 배상지 이석지 이 행 변 숙
김광치 이종학 이양소 민 유 문익점 임귀연 조희직 김사렴

김승길 조 유 김 제 조 윤 범세동 구 홍 윤충보 성사제
김중한 류 구 박문수 민안부 체와택 송 교 최칠석 차원부

김자진 조철산 김약시 정 온 이 연 송 인 곽 추 체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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