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망경대(淸溪山 望京臺) - 송산공 은둔지(松山公 隱遁地)
청계산은 서울시 서초구와 경기도 의왕시, 과천시, 성남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618 m의 산이다. 옛 이름은 청용산(靑龍山)으로 이 산정에서 청용(靑龍)이 승천했다고 전한데서 생긴 이름이다. 산 중에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이 통일신라 때 창건된 청계사(淸溪寺)이다.
이 청계산 산정에 석대(石臺)가 하나 있는데 이 석대가 바로 만경봉(萬景峰)이다. 이곳에 오르면 눈 아래 만경(萬景)이 전개된다는데 서 유래한 이름이다.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가 반도에 군림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에 대지팡이와 짚신 차림의 초라한 선비 하나가 이 만경봉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면서 고려의 멸망을 슬퍼했다. 이태조가 공의 절개를 찬양하고 재주를 아껴서 호조전서(戶曹典書. 判書)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서산의 고사리 캐기(백이숙제의 절의)를 원한다며 청계사에 은둔하면서 매일 청룡산 상봉인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행색이 초라한 이 선비가 바로 고려 충신의 한 사람인 조견이다. 이후로 세인들이 만경봉(萬景峰)을 망경대(望京臺)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조견(趙견: 1351~1425)은 처음의 휘(諱)는 윤(胤)이었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호는 송산(松山)이다. 여조(麗朝) 벼슬은 지신사(知申事. 都承旨)까지 올랐고 여말 조정에서 공의 굳은 지조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외직인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 觀察使)로 내보낸 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공은 통곡하며 두류산(頭流山. 현 智異山)으로 들어가 이름도 견(견)으로 고치고 자도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망해도 죽지 못함을 개에 비유한 것이며 개는 옛 주인을 따르는 의(義)를 취함이다’ 라는 뜻이다.
조견은 이집(李集), 원천석(元天錫), 길재(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빛냈던 명유(名儒)로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趙浚)의 친 동생이기도 하다. 고려의 신하이던 이성계가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때려죽이고, 조선의 태조가 되었으니 지금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명신들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 사상으로 이색을 위시해서 조견, 길재 등이 이태조에게 등을 돌리고 청계산을 찾은 것이다. 이태조에게는 정도전. 조준. 배극렴 등이 따랐을 뿐 명신들은 두문동으로 삿갓을 쓰고 사라지고, 송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정도전이 궁여지책으로 과거를 통해 인재를 구하기로 하고 널리 과거 통문을 보냈으나 문과, 무과에 응시한 것은 시골사람 밖에 없었다. 이 때 이색이 이태조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이색이 궁에 들자 이태조는 친히 나아가 맞아들였으나 왕좌에 오른 것을 본 이색은 “구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음이요 형에게 신도(臣道)를 다 하러 찾았음은 결코 아니외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물러갔다.
길재는 조선왕조에서 준 박사의 칭호도 물리치고 입궐도 않은 채 양모 차(養母 次) 입산한다는 편지만 전하고 사라졌다. 김자수 또한 5.6차의 초청에 못 이기어 사당에 들어 최후를 고하고 음독자살로써 이성계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송산공 조견은 자기의 이름이 조선공신록에 오른 것을 보고 실소를 하며 “이는 형(趙浚)이 아우를 아낌이 아니라 아우를 욕보임이 크외다.”하면서 이태조가 준 호조전서(戶曹典書)의 벼슬을 받지 않았다.
그 후 이태조가 공의 형인 조준(趙浚, 文忠公)을 대동하고 공이 머물고 있는 청계사에 갔으나 상견(相見)되지 않아 군신지간(君臣之間)이 아닌 옛 정의에 의한 붕우지예(朋友之禮)로 상견을 청하여 서로 읍 만 하고 마주앉아 조정에 나와 주기를 간청했지만 거절당하고 “공의 굳은 지조는 금석(金石)같아서 가히 뺏을 도리가 없다”며 “청계산의 한 면을 공을 위해 내려주고 석실을 지어 그의 정절(貞節)을 기리라” 하였으나 공은 곧 양주(楊州)에 있는 수락산 기슭의 한 마을(현 의정부 송산마을)로 은거하자 공과 뜻을 같이 하던 여말 충신들이 그곳으로 모여 함께 은둔하다가 75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