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련사(妙蓮寺)와 자은군(慈恩君)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을 숭산(崧山)이라고 한다. 숭산은 남쪽으로 세 개의 재가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용(龍)이 서리고 있는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봉(鳳)이 높이 솟은 것 같다. 이러한 용의 배에 해당한 위치에 웅거하고 봉의 날갯죽지에 해당한 위치에 붙어서 절이 있는데, 이 절을 묘련사라고 한다.
그 당시 충렬왕이 부처를 높이 선양하였다. 종묘사직의 복을 맞이하려는 원나라 지원(至元) 2년(1336년) 가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의 여름에 낙성하였다.
절을 처음 연 사람은 사자암(獅子菴)의 노숙(老宿) 홍서(洪恕)라는 사람이다. 처음 원혜국사(圓慧國師)가 맹주(盟主)가 되어 결사(結社)하였을 때, 홍서(洪恕)가 또 그 다음 대를 이었으며, 세 번째 무외국사(無畏國師: 5世 混其)에 이르러서는 배우는 자가 더욱 많이 모여 들었다. 무외국사에게는 임금이 재(齋)를 대행하게 하였고, 충선왕은 더욱 그 예를 정중히 하여 모든 불교의 원문(院門)과 선종(禪宗), 교종(敎宗)의 여러 사찰에서는 감히 그러한 대우를 바라지도 못하였다.
무외국사의 앞에는 의(義)와 인(因)이 있었고, 무외국사의 뒤에는 분(芬), 련(璉), 홍(泓), 염(焰), 여(如)라는 이들과 당두(堂頭) 길(吉)은 모두 승려 중에서 선택된 자로서 계승 유지하여 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분향과 촛불 등 온갖 절의 의식이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순암 의선(順菴 義旋) 공은 원혜국사의 적사(嫡嗣)이자, 무외국사 혼기의 조카인데 중국의 천자가 삼장이라는 호를 내리며 북경의 대연성사(大延聖寺)의 주지를 명하였다. 그 뒤, 지원(至元) 병자년에 천자가 내리는 향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조용히 충숙왕에게 아뢰기를, “묘련사는 충렬, 충선왕의 지원(祇園)으로서 그 분들의 초상이 옛 그대로 있습니다. 전하께서 새로 수리하신다면 조상을 받드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감동된 바 있어 드디어 金과 銀 그리고 보기(寶器) 수백만을 하사하여 그 절의 상주 재산, 즉 기본 재산으로 돌려주니, 그들이 서로 권면(勸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