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조회 수 105 추천 수 0 댓글 0

6세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목차

Ⅰ. 머리말

Ⅱ. 충렬왕과 조인규

Ⅲ. 충선왕과 조의선

Ⅳ. 의선의 법계와 삼장법사 피봉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천태승 순암 의선(順庵義旋)은 고려 후기 대표적 명문가인 조인규의 아들로, 고려

불교계에서는 물론 원 황실에서도 극진한 존경을 받아 한국불교사상 유일하게 삼장법

사 법호를 받은 인물이다. 부친 조인규나 충선왕대의 조비사건 등으로 주변 인물에

대해서는 연구가 어느 정도 되어 있으나, 의선이 어떤 공적으로 삼장법사가 되었

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주로 원의 대도에서 활동한 충

선왕의 불사(佛事)와 관련하여 의선 삼장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인규는 뛰어난 몽골어 실력을 바탕으로 쿠빌라이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으며, 충

렬왕의 중요한 신하 중 하나로 가문을 일으켰다. 의선은 어려서 출가하여 선선(禪選)

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할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원혜국통(圓慧國統)의 적사(嫡嗣)이

고 백부인 무외국통 정오(無畏國統 丁午) 혼기(混其)의 뒤를 이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천태·법화사상은 6세기에 고구려승 바야(波若)에 의해 초전되었고,

고려 초기에 제관(諦觀)·의천(義天) 등의 활약으로 천태종으로 거듭나며 세력이 확장

되었다. 그러나 의천의 입적 이후 천태종은 약화되었고,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다. 고려 건국 초부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

해 온 불교계는 세월이 흐르며 점차 귀족적·보수적·국가 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며 교

계 안팎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그 과정에서 천태종 내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개혁운

동이 일어났는데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가 그것이다.

전남 강진의 백련사에서 결성된 백련결사운동으로 천태종은 다시 확장 되었다. 그

런데 요세⟶천인⟶원환⟶천책⟶이안으로 이어지던 백련사의 전통은 충렬왕 대에

개경의 묘련사로 그 중심이 옮겨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로 창건된 묘련사는 『묘법연화경』의 법화사상에 근

거한 천태사찰이었으나 쿠빌라이의 복을 비는 축리(祝釐)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따

라서 묘련사는 그 사상에 있어서 최하층민의 구제까지 표방하던 기존의 백련사 정신

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후에 묘련사는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까지 장악하며

귀족 불교의 본산이 되었다.

특히 13·4세기에는 고려 후기 최고의 명문가인 조인규가가 주축이 된 묘련사계의

혼기(混其), 의선, 보해(普解), 희암(熙菴) 등이 이끌게 되었다. 이제 그 대표적 인물인

천태승 의선이 묘련사에서 출가한 과정을 살펴보고, 그가 원의 티베트불교 사찰인

대천원연성사의 주지를 맡게 된 것과, 한국불교사에서 유일하게 삼장법사라는

명예로운 법호를 받게 된 배경에 대해 여원 양국의 불교계를 통해 고찰해본다.

 

Ⅱ. 충렬왕과 조인규

 

1. 속가 배경

 

의선의 부친 조인규(趙仁規, 1237~1308)45)는 충렬왕대의 명신으로, 일찍 학문을

시작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태자부의 시위(侍衛) 중 행오(行伍)에 충원되었는데,

그는 무인임에도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몽골어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 결과

‘문을 닫고 밤낮으로 삼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이) 매우 뛰어난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중국어도 열심히 익혀 그것을 바탕으로 고려와 원의

중요한 사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조인규의 행운은 1248년(고종 45년)에 세자 왕전(후의 원종)이 대륙으로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쿠빌라이(원 세조, 1260~1294 재위)와 손잡은

원종의 탁월한 선택과 그들 자녀의 혼인관계로, 고려 왕실은 국내외에서의 안정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 과정에서 조인규는 유창한 통역으로 쿠빌라이의 극찬을

받았고, 그것은 곧 조인규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조인규는 이후 30여 차례나

원을 드나들었고, 조씨 가문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명문대가가 되었다.

관직은 일품(一品)인 평양군(平壤君)에 이르렀으며, 정숙공(貞肅公)에 추증되었다.

그의 장인은 종삼품인 사재경 직의 한산조씨 조온려(趙溫呂)이다.

 

조인규의 직계 5남 4녀들은 고종·원종·충렬왕·충선왕 대에 걸쳐 왕비와 재상 등의

고위직을 맡으며 정치권의 핵심에 있었다. 둘째 딸은 이른바 ‘조비사건’(1298년)의

주인공인 충선왕의 조비였고 나머지 세 딸도 모두 명문가로 시집을 갔다. 또한

의선을 제외한 네 아들은 모두 조인규의 뒤를 이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번창한

자손들의 영달은 세세손손 이어져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인 조준(趙浚, 1346~1405)

과 태종의 부마 조대림에게 까지 연결된다.

 

조씨 집안은 비단 세속적인 성공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여원 양조의 불교계에서도

주요 천태승을 여럿 배출하였다. 진구사(珍丘寺) 주지인 대선사 혼기(混其), 삼장법사

(三藏法師) 의선, 의선의 조카인 수원 만의사의 보해(普解), 증조카 묘혜(妙慧)에

이르기 까지, 조인규가는 원간섭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속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명문대가가 되었다. 조인규 가문의 출세와 영달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인규는 개인의 피나는 노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고려 후기의 최고 명문가를

이루었고, 아들 의선은 삼장법사까지 될 수 있었다.

 

2. 출가 동기

 

의선은 조인규의 4남으로, 손위 형인 조연수(1278년생)와 아우 조위(1287년생)의

출생 연도를 고려해 볼 때 1278에서 1287년 사이에 태어났다. 조위가 1349년

4월에 먼저 사망하였고 의선은 1355년 10월경에는 사망하였으므로 그의 생존 기

간은 적어도 70세 이상으로 보인다.

 

순암법사 의선은 유년기에 출가하였다. 그의 출가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사료는 충선

왕의 1차 즉위시인 1298년(충렬왕 24)에 일어난 이른바 ‘조비저주안(趙妃詛呪案)’

이다. 이 사건은 계국대장공주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던 조인규의 딸 조비를

질투하여, 조인규의 처가 자신을 저주하게 하였다고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원 황실에서 항의하여 충선왕은 불과 7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조인규와 처,

세 아들(서·련·연수)과, 사위(박위·노영수) 및 딸들까지 하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인규

는 다음 해에 경조로(중국 서안)로 유배되었고 6년 후에야 고려로 돌아왔다. 충렬

왕은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 일은 조인규 가문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으나

의선과 동생 조위는 처벌 대상에서 빠져 있다. 조위는 1287년생으로 당시 갓 열살을

넘은 어린아이였고, 의선 역시 10대의 승려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사료는 1308년에 쓰인 조인규의 묘지명으로, 의선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한다. 의선은 천태종 승려였음에도 승과 중 선선의 상상과에 급제하였고

이로 인해 20대 초반에 이미 그의 법계는 선사였다. 또 진구사 주지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단지 명문가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승려로서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의선의 출가 동기에 대해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중 어느 한

가지 이유로 출가했다기보다는 복합적 요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첫째, 시대적 배경으로, 정종은 1036년에 아들 넷이 있는 각 가정에서는 하나를

출가시킬 것을 명하였고, 문종은 1059년에 다시 개경,서경 및 동남주부구현에서

아들 셋이 있는 집은 한 명을 15세에 삭발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 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조인규가에서는 4남인 의선이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불교에 매우 심취한 부친 조인규의 영향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조인규묘지

명」에 의하면, 그는 독실한 불자로 전심으로 불사를 하여, 금자 『법화경』과 『대장경』

을 간행하고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때 심한 병고에 시달렸는데, 꿈

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조정숙공사

당기」에도 조인규가 ‘불교에 독실하였다(篤於釋敎)’하였으며, 자신의 거처를 기원(祇

園: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과천에 청계사를 창건하여 왕을

축원하였고 많은 경전을 보급하였다.

 

의선이 부친에게서 영향을 받은 또 한 가지는 문예 방면의 재능이다. 조인규는 무인

출신이지만 외국어도 잘 했고 언사에 능했으며, 『사서(四書)』의 전기에 관심이 많았고,

필법도 능하였다고 한다. 의선 역시 당시의 최고 지식층인 이곡·이제현·민사평 등의

문인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큰 글씨를 잘 써서 자신이 거처한 허정당(虛淨堂), 계

림부 공관인 의풍루(倚風樓), 묘련사 법당의 편액 등을 썼다. 또한 그는 문장에도 능하

였고, 고위직 승려였음에도 생활이 검소하여 재물이 생기면 모두 불사에 썼다고 한다.

 

셋째, 백부 혼기(混其)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혼기는 진구사 주지이자 대선사이

며, 『법화영험전』의 찬자이다. 이 책의 발문에 의하면 혼기는 충숙공 조인규의 형

이며 의선의 백부이다. 혼기가 1313년(충선왕 5년)에 수원에 만의사를 중창하여

주석한 이후, 만의사는 조씨 집안의 원당이 되어 의선을 비롯한 조씨 가문 출신의

승려들이 뒤를 이어 주석하였다.

 

한편 의선이 일생 불교를 신앙할 것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그는 출가 후인 1314

년, 개주(開州)에 있을 때 중병에 걸렸는데 어떤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치료를 위

해 불은사(佛恩寺) 약사유리광 불상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서

신인이 준 약을 먹고 다음 날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의선은 그 이후 죽을 때까지

불교를 받들기로 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출가한지 여러 해가 지난 때였지만 이 일로

불심이 더욱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5世 혼기 대선사는 『해동불조원류』에 의하면 무외국사사의 이름이 혼기, 자가 진구,

호가 목암, 성은 趙氏로, 원묘의 11세손이라 한다. 만의사가 천태종 사찰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천태종 진구사의 주지였던 혼기가 충선왕의 명으로 1312년에 와서 크게

중창하면서부터이다. 이어 의선이 주지가 되며 천태종 중심사찰로 기반을 굳혔다.

 

Ⅲ. 충선왕과 조의선

 

1. 호불왕 왕장(王璋)

 

원종은 어려운 국내외 정세를 해결하기 위해 쿠빌라이를 동반자로 선택하였다. 그

들의 자녀인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연혼으로 태어난 충선왕(王璋)은 칭기즈 칸의

직계 가족인 이른바 ‘황금가족혈맥’(altan urugh)의 일원으로 출생과 함께 고려왕위

승계권이 주어졌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부터 유학관련 서적을

즐겨 읽었고, 그의 그런 모습에 외조부인 쿠빌라이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1298년의 1차 즉위 후 ‘조비무고사건’으로 퇴위 당한 충선왕은 대도로 가서 10년간

카이산(무종), 아유르바르와다(인종) 형제와 한집에서 지내며 숙위하였다. 당시 충선

왕은 24세, 무종과 인종은 각각 17세, 14세이었다. 형제는 충선왕의 모친 제국대장공

주와의 관계로는 충선왕의 조카(당질)였고, 왕비인 계국대장공주쪽으로 보면 4촌

처남이 된다. 1307년 성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황위쟁탈전이 벌어져 황후

복로한(부르간)·안서왕 아난다(阿難答)파와, 회령왕 카이산(海山) 형제의 두 파로

갈라졌다. 충렬왕은 전자를 지지했으며 충선왕은 카이산 형제를 지지했다.

그 결과 카이산(무종)이황위를 계승하였고 동생이 황태자(인종)가 되었다.

충선왕은 그들의 즉위를 도운 정책공(定策功)으로 심양왕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충선왕은 원 역사에서 유례없이 고려와 심양 두 곳의 왕위에 재임하는

우대를 받았다.

 

풍부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충선왕은 황태자의 태사로 임명되었고, 인종의 즉위

후에는 과거제 부활을 돕고 또 만권당에서 교류했던 인재를 인종에게 추천하기도

하였다. 불교와 유교에 두루 해박했던 충선왕은 무종과 인종의 치세에도 큰 도움을

주었고, 황명으로 여러 차례의 행향과 성지순례, 황실에 승려의 법문을 청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충선왕은 여원 양국에서 인정하는 호불왕(護佛王)이었던 만큼, 그

무렵부터 『원사』나 『고려사』에는 충선왕의 불교와 관련된 기사가 자주 보인다. 해인

거사(海印居士) 충선왕은 원과 고려에 여러 사찰을 창건하고, 양국의 주요 사찰에 많

은 대장경을 보급하였으며, 반승 및 사경을 하고 오대산, 천목산, 보타산 등의 불교유

적지를 참배하였다. 또한 대도의 사저에 학문을 위한 공간인 만권당과 함께, 참선 수

행을 위한 제미기덕당을 갖추고 열심히 수행도 하였다. 그의 불교신앙은 당시 고려불

교의 주류였던 천태종이나 원의 티베트불교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화엄종(고려혜

인사), 선종(명본선사), 문수신앙(오대산), 관음신앙(보타산), 보암신앙(보암선사), 미타

신앙(백련종) 등 불교 전반에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충선왕의 이런 활발한 불사 행위는 물론 개인적인 신앙심이 기초가 되었겠지만, 황

제와 황후를 위한 축리, 행향, 대장경 기진 등을 통해 고려에 대한 입성책立省策을

무마시키는 실익도 있었다. 그가 정치적 이유로 토번으로 유배를 갈 때의 표면적인

죄명은 ‘불교에 대한 잘못된 집착’으로, 출가하여 불학을 공부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또 그가 평소에 출가를 원했던 점을 감안하여 대도의 황실사찰 석불사에서 삭발시켜

서, 제사 파스파가 태어나고 출가한 티베트 시가체(日喀則)의 사캬사(薩迦寺)로 유배

를 보냈다. 사캬사는 원 최고의 사찰로 지금도 경전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

명한 곳이다.

 

충선왕은 원 황실 구성원 가운데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여원의

유자들과 두루 교류하였고, 시서에 능하고 정치력도 있어 인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

정치방면의 스승인 태자태부를 맡기도 했다. 인종 역시 충선왕의 영향인지 학문을 좋

아하고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다. 충선왕의 도움으로 인종대에 과거제가 부활되었고

충선왕의 추천을 받은 유능한 인재들의 활동으로, 인종의 약 10년간의 치세는 원의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로 평가된다.

이렇게 불교와 학문, 인재를 사랑한 충선왕에게 있어, 실력도 탄탄하고 신앙심도 깊

으며, 더구나 조비와 남매간인 의선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승려였을 것이다. 의선은 명

문가 조인규 가문 출신의 승려이면서, 쿠빌라이의 축리를 위한 묘련사에서 출가하였

고, 선선의 상상과에 합격하는 등 탁월한 실력까지 갖추었기에 대도의 대천원연성사

의 주지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묘련사와 대천원연성사

 

의선이 출가한 묘련사는 중요한 천태종사찰 중 하나로,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원 황제의 축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중건한 사찰이다. 『고려사』에는 1283년 6월에 왕

과 공주가 묘련사에 간 기사를 시작으로, 설법·대장경 간행·원 황제의 축리·행향추복

(行香追福) 등을 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1302년에는 제국대장공주(1297년 사망)의 영당이 설치되었고, 후에 충렬왕과 충선왕

의 진용도 모셔졌다. 신라시대부터 중국의 원묘(原廟, 神御殿·影堂)제도의 영향으로

절에 왕의 어진(御眞)을 모셨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것은 영전제도(影殿制度)로

확립되었다. 즉 중앙에는 경영전(景靈殿), 지방의 사찰에는 영전을 건립, 선왕의

어진을 모시고 봉사(奉祀)하였던 것이다.

 

의선은 출가사찰인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영전과 관련된 여러 작법을 익혔을 것이고,

후에 그가 원의 명종제후의 영당이 있는 대천원연성사의 주지가 된 것도 이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의선은 원에 가기 전에 이미 고려에서 진구

사·만의사·영원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였는데, 만의사에서 주지로 있을 때의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조인규가의 번성함이나 당시 원과의 원활한 교류 등을 고려해 보면, 의선이

대천원연성사의 주지를 맡기 전, 즉 충선왕의 생존시에 대도에 여러 차례 갔을 가능

성은 매우 크다. 편도에 열흘에서 보름 정도 걸렸기에 대도에 가는 것이 그다지 어려

운 일은 아니었다. 충선왕이나 충숙왕을 통해 원 황실에서도 의선의 됨됨이나 능력

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태정제의 부친을 위한 대천원연성사의 주지를 맡길 수 있

었을 것이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쿠빌라이를 비롯한 황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무종, 인종과의 특수한 관계로 1308년부터는 원의 황실과 정책에 큰 영향력을 가졌

다. 무종의 즉위 다음 해인 1309년에는 무종의 모후인 황태후와 황태자(인종)를 모시

고 문수보살 성지인 오대산으로 순례를 갔고, 이 행사로 오대산에 처음 티베트 불교

사원이 창건되기도 하였다. 인종이 1311년에 즉위하자 충선왕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왕은 인종이 치세하던 10년간 최측근세력으로 황제를 도와 과거제를 부활시키고, 만

권당에서 교류하던 유자들을 천거하였다. 충선왕은 조비무고 사건으로 1차 퇴위 후

대도에서 무종 형제와 약 10년간 한 집에서 지냈으며, 그들의 즉위에도 직접 간여하

였다. 또 인종의 태자시 스승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충선왕은 원 황실에서 불교와 유교 방면에서 확실히 인정받을 정도로 해박하였고,

의선은 뛰어난 학승이었기에 충선왕을 통해 의선은 원 황실에 이미 고승으로 알려졌

을 것이다. 1320년에 토번으로 유배를 갔던 충선왕은 태정제가 즉위하며 감형되어

1323년에 임조(臨洮)로 옮겼고, 얼마 후 사면되어 대도로 돌아왔다. 의선이 대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도 이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신어전(神御殿)이 있는 대도의 황

실사찰 12곳은 건축물은 모두 티베트불교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주지직은 티베트불교

승려뿐 아니라 고려의 천태승 의선처럼 당시에 존경받던 유명한 고승에게 맡겼다. 태

정제와 의선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는 바로 충선왕으로, 태정제는 계국대장공주의

동생이고 의선은 조비와 남매이므로, 두 사람 모두 충선왕의 처남이 된다.

 

충선왕은 토번에서 돌아와 1325년에 대도 사저에서 사망하였다. 의선은 1332년에

황제에게서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三藏法師)의 법호를 받고

대도 대천원연성사(黑塔寺)의 주지로 임명 되었다. 의선이 20여년간 주지로 있었던

대천원연성사는 본래 노사사(盧師寺)였는데, 진종(晉宗, 태정제)이 1326년에 부친의

영정을 모시는 신어전을 지으면서 대천원연성사라 사액(賜額)하였다.

 

또 1333년에는 충숙왕이 의선을 대도의 대보은광효사(大報恩光孝寺, 후의 大報恩

光敎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이곳은 충선왕이 1317~1319년에 창건한 사찰로, 왕이

토번 사캬사로 유배를 가면서 황폐화 되었는데, 충숙왕과 심왕이 충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의선에게 맡긴 것이다. 이 부탁에는 의선의 승려로서의 뛰어난 자질뿐 아니라,

충선왕과의 특수한 인연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충숙왕과 심왕에게 있어 의선은

부왕의 유지를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승려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의선이 삼장법사 법호를 받은 직접적 이유는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

道陽懺法)을 중각·유포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삼장법사는 불교학에 해박

한 승려이면서, 특히 중요 불서를 번역한 경력이 더욱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3. 원의 삼장법사

 

과문한 탓이겠으나 원대의 불교사에서 삼장법사는 티베트 불교 승려인 석사라바釋

沙囉巴와 석달익바釋達益巴, 고려의 의선 세 사람만 보인다. 석사라바와 석달익바는

충선왕이 원 황실의 일원으로서 행한 다양한 불교 활동을 할 때 보이는 인물로 둘 다

무종대에 삼장법사 법호를 받았다.

 

원대에는 티베트 불교 사캬파(薩迦派) 출신의 파스파가 최고위 승직인 제사(帝師)가

되며, 이후 원이 멸망할 때까지 10명의 제사가 있었다. 석사라바는 파스파 다음의

2대 제사도 역임하였다. 삼장법사는 경·률·논 3장에 두루 정통한 승려에 대한 존칭

으로 ‘삼장비구’, ‘三藏聖師’, 혹은 ‘삼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인도나

서역에서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한 승려를 ‘譯經三藏’ 혹은 ‘삼장법사’라고 하였

다. 중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삼장법사는 요진의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당의 현장

(玄奘)이다. 원의 세 삼장법사도 경전 번역과 관련이 있었기에 삼자의 법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대에는 티베트 불교 승려가 가장 존중을 받았고, 고려승들은 그 다음으로 존숭되

었다. 고려승들이 계율을 잘 지키고 현세에서 축원의 공능이 뛰어나다고 인식되었

기 때문이다. 반면 선종의 한족 승려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원의 삼장법사는 제사보다는 아래였지만, 경전의 번역에 공이 큰 승려에게 내리는

법호였다. 세 삼장법사 중 석사라바와 석달익바는 무종에게 법호를 받았으며 인종

대에 입적하였다. 그런데 무종과 인종대의 황실불교는 불사나 승려와의 관계에 있어

충선왕의 역할이 많이 보인다.

 

석사라바(1259~1314년, bla-ma chos-rje)는 대도 경수사(慶壽寺)의 승려로, 서국

적녕(積寧, 河西) 출신이다. ‘사라바’의 의역은 불지(佛智)이고 음역은 ‘실라복곤초극

(혹은 석나복錫喇蔔)’이다. 그의 전체 법호는 홍교불지삼장법사(弘敎佛智三藏法師)

인데 원 세조에 의해 파스파(Hphags-pa)의 뒤를 이어 차기 제사에 임명되었다.

불지는 어려서 출가하여 제 부의 관정법을 익히고 대소승을 배웠다. 유불에 모두

능통하였으며, 티베트어와 한문, 몽골어 등 여러 언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를 ‘진주(秦

州, 감숙성 天水) 법사’라고도 한다. 불지는 쿠빌라이의 칙명으로 중국에 전해지지 않

은 티베트어장경을 한문으로 역출하였고 그 공으로 특별히 ‘대변광지법사라는

호를 받았다. 또 그로 인해 쿠마라지바의 후신으로도 불렸다.

 

무종황제는 지대연간(1308~1311년)에 불지를 대도로 청하여 광록대부대사도 직을

하사하였다. 그로부터 불지는 ‘元朝光祿大夫大司徒三藏法師沙囉巴’가 되었으며,

황제는 그를 경수사에 주석하게 하고 또 그가 번역한 것은 모두 조정에서 간행

하였다. 황태자(인종)와 제왕들이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었다.

 

무종과 인종은 황실의 어른인 충선왕의 도움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유교정책은

물론 불교신앙에 있어서도 충선왕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경수사는 매우 중요한

황실사찰 중 하나로, 충선왕은 경수사에 대장경을 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계국

대장공주의 개가운동으로 충선왕과 갈등을 빚던 충렬왕도 한때 그곳에 머물렀다.

 

인종은 1314년 10월 5일에 석사라바가 미질을 보이자 초鈔 1만민緡을 하사하고,

태위심왕(충선왕) 편에 약을 보내었다. 사라바는 얼마 후 불상을 바라보고 앉은 채

입적하였다. 석사라바와 충선왕이 그전에도 직접 교류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인종이 황실을 대표하여 왕을 보내어 약을 하사한 점, 경수사와의 인연 등을 고려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황실 구성원 가운데 유학은 물론 불교에 대해 충성왕

만큼 깊은 조예를 갖고 있던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의선에 앞서 석달익바釋達益巴(1246~1318년)라는 또 한 명의 삼장법사가 있는데

그 역시 『불조역대통재』에 전기가 전한다. 이 기사에 충선왕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석달익바가 무종과 인종 뿐 아니라 황실구성원의 귀의를 받았으며,

또 경수사에 머물렀던 점 등으로 보아 석사라바와 마찬가지로 충선왕과 교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석달익바는 서역인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13년간 파스파 제사를 모셨다. 파스파의

가르침으로 대소승 율론 및 밀교의 핵심을 꿰뚫었다. 파스파가 토번으로 돌아갈

때 그를 임조臨洮까지 모셨으며, 이후 19년간 다른 스승 밑에서 수행 정진하였다.

후에 석진인釋秦人이 그를 고불사古佛寺의 주지로 청하였다.

 

석달익바는 밀교뿐 아니라 현수종의 교의에도 두루 통하였으며, 덕행이 조야에 널

리 퍼졌다. 그런 이유로 무종 즉위시에는 특별히 그를 청하여 법의法義를 물었고, 황

제가 큰 상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석달익바도 석사라바와 마찬가지로 말년

에는 경수사에 머물며 불법을 선양하였다. 무종은 친히 경수사에 가서 강의를 듣고,

특별히 ‘홍법보제삼장대사弘法普濟三藏大師’라는 봉호와 금인金印·자포가사紫袍袈裟

일습을 상으로 내렸다. 달익바는 1318년 8월 16일에 73세로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인종은 황제, 황후 양궁에 명하여 장례비용을 대게 하였고 ‘우성국사祐聖國師’라는 시

호를 내렸다. 황태자․재상 등의 왕공대신 및 황성호위 등은 함께 그의 전신법체를 탑

에 안치하고 공봉 하였다. 이 과정에 충선왕 역시 모종의 역할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이상 파스파의 제자인 석사라바, 석달익바는 모두 무종과 인종대의 삼장법사로, 경

수사에 주석하며 황실가족에게 관정을 하고 법요를 가르쳤다. 토번승도 아니고 파스

파의 제자도 아닌 고려 천태승 의선이 그들과 나란히 삼장법사 법호를 받은 배경에는

결코 충선왕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Ⅳ. 의선의 법계와 삼장법사 피봉

 

1. 원혜(圓慧)와 무외(無畏)

 

의선의 법통은 멀리는 제관·의천으로 연결되지만, 고려 후기에 국한하여 본다면 원혜

와 무외의 법통(‘圓慧之嫡嗣, 無畏之猶子’)을 이었다. 원혜국통 경의(景宜)는 충렬왕이

1284년에 원 황제 세조와 성종을 위한 원찰로 창건한 묘련사를 천태결사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고 1295년에 국사가 되었다. 충렬왕은 1301년 정월 한 달간 원 황제를

위한 축원과 기일행향(忌日行香)을 하기 위해 세 차례나 묘련사에 행차하였다.

 

처음부터 천태종단의 사찰로 출발한 묘련사는 원혜국사가 왕의 뜻을 받들어 초대

주맹이 되어 『법화경』·『법화문구』·『법화현의』 등을 강의하며 묘련결사를 주도하였다.

원혜는 무외국통 정오의 법형이었다. 정오는 조인규의 형 혼기(混其)로, 진구사 주지

이며 만의사를 중창하였다. 정오는 어려서부터 묘련사에서 장성하였고 원혜의 가르

침을 받았다. 그는 태조의 4대 법사인 능긍(能兢)의 종풍을 천책(天頙)을 통해 이어

받았다. 능긍은 법화경과 천태지자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의하여 삼한을 합하여

한 나라로 이룬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정오는 능긍이 지적한 그 회삼귀일과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창, 그리고 종단의 본산인 국청사의 위상을 언급하면서 1309년에

묘련사에 주불을 봉안하였다. 정오가 1302년부터 묘련사에 주석하며 묘련사 계열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정오는 1306년 대선사, 1307년에는 왕사로 책봉되었다.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에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禪敎各宗山門道伴總攝調堤)

가 되었다. 1309년에 천태종 본산인 국청사에 주석하였다. 그 후 1313년 국통으로

임명되었으며, 1314년에는 영가종의(永嘉從義)의 주석서인 『천태사교의집해』

(天台四敎儀集解)를 개판·유통하였다. 또한 1315년의 국청사 낙성법회에서는

『법화예참』을 편찬하였는데 이런 서적의 편찬은 교학을 중시한 묘련사의 사상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선이 원의 대천원연성사에서 편찬한

『예념미타도량참법』도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 후 정오는 금장사·국청사·영원사 등에서 주석하다가 1318년 용암사로 이주하여 절을

중창하였으나 이후의 사적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유력하기를 좋아했으며 음률을 알았

고 피리(笛)를 잘 불었으며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이후 쇠퇴해진 묘련사는 의선에 의해 다시 한 번 천태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천태종의 백련결사는 참회와 염불 중심의 대중운동으로서 훗날 천태법사종

(天台法事宗)으로 되고 중앙에서 행해진 묘련결사는 법화독송과 교학연구 중심의

학해불교로서 훗날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으로 분파되었을 것으로 본다.

 

원혜와 정오의 가르침이 의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요세의 백련결사의 특징인 법화의 실천신앙을 강조하였고 교학연구를 중시 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2. 의선의 법맥

 

의선의 대표적인 문도는 희암(熙菴)과 나암 원공(懶菴元公), 휴상인(休上人), 요원(了圓)

등의 석자와, 이곡·이제현·민사평 등의 유자를 들 수 있다. 유자 층은 대도에서는 물론,

귀국 후에도 묘련사에서 주기적으로 모여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더구나 의선에

관하여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이 그들에 의해 씌어졌기에 그들을 문도로 다루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승려들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희암은 속성이 조씨이고 대사도(大司徒)에 책봉되었던 것으로 보아 의선의 집안인

묘혜(妙慧)로 보인다. 그는 한수・이색・이숭인 등 유생들과 숭교사・송림사・당사唐寺

(光巖寺)・불은사・지장사 등에서 교유했으며 함께 백련결사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희암은 의선의 발길을 따라 불은사 등 여러 사찰들을 순례하였으며 특히 그는 중국

에서 의선보다 뛰어나다는 평가와 불타와 같다는 극찬을 들었다. 귀국 후 공민왕에게

청하여 궁궐에서 스승 의선의 추모재를 베풀었고 우왕 대에는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

에 올랐다. 한편 희암은 의선의 제자였지만 정오丁午의 법도 계승하였다.

다음의 시는 그가 스승 순암 의선을 추모하며 쓴 것이다.

 

허정당 안에 늙은 순암이 스승이 되니 청색이 쪽에서 나왔네.

셋을 회통하여 하나로 돌리자 끝내 입을 다물고

진실을 드러내고 권교를 제쳐놓아 문득 말을 하였네.

먼지를 뒤집어 쓴 천자가 임금을 알현함을 가납하였고

지난 일을 생각하여 국왕은 중직에 참여함을 허락하였네.

속세의 영욕이 이제 사라져 버린 듯한데

구름은 갠 허공에 있고 달빛은 못에 있네.

 

나암 원공도 의선의 제자로 천태판사와 복리군에 책봉 되었다. 유생들은 그를

나잔자懶殘子라 불렀다. 나암은 오동(吳仝)의 아들인 휴상인을 제자로 두었다.

그는 개성의 광제사・보제사・지장사・신륵사 등에 머물렀으며 의선이 의천의

후신이라며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휴상인과 더불어 백련결사정신을 계승한 천태종의 고승은 법화영험전을 찬술한

요원(了圓)이다. 이 책의 발문은 조인규 가문의 보해가 썼고, 그의 조카이면서

조준의 형인 묘혜가 수원 만의사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요원은 묘혜와 함께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慘助宣講義)도 간행하였다.

이 책의 발문은 1378년(우왕 4)에 영암사 주지였던 선사 묘혜가 썼다.

고려 후기의 불교계는 조계종과 천태종을 필두로 하여 유가종, 화엄종 등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고려 말 천태종계를 주도하던 승려는

조인규 가문출신인 의선에서 희암과 나암, 휴상인, 요원, 묘혜 등으로 이어졌다.

 

3. 의선과 예념미타도량참법

 

허정당(虛靜堂) 의선은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의 명문가 소생으

로,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당시의 유력 사찰들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중국의 주요 사찰의 하나로, 태정제의 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대천원연성사의

주지로 발탁되었다.

 

물론 의선의 출가자로서의 출세는 원 황실의 총애와 신뢰를 받았던 부친 조인규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의 후원에 힘입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속가 배경보다는 승려로서의 의선의 됨됨이가 더 중요한 성공요인이었으리라

판단된다. 의선은 한국불교사상 유일하게 영예로운 삼장법사의 칭호를 받았다.

원대에는 티베트 불교계의 석사라바와 석달익바 두 명의 삼장법사를 배출한 것 외에,

고려의 의선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의선은 고려에서 선선(禪選)의 상상과에 합격한 선사였으며, 묘련사·국청사·만의사·

영원사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천태종 사찰에서 주석하였다. 그리고 그가 대도에서

오랫동안 주석한 대천원연성사는 라마교(喇嘛敎) 사찰이었다. 또한 충숙왕과 심왕의

청으로 주지직을 맡게 된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는 화엄승이 주석한 곳이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다양한 불사를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대도 창의문(彰義門) 밖에

대보은광교사를 창건한 것이다. 충선왕은 1319년에 낙성된 이 사찰에서 항주의

천태종 승려를 초빙하여 천태교학을 강의하게 하였고, 화엄종 승려에게 주지를

맡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충선왕이 1320년~1324년까지 토번으로 유배를 갔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은 1325년에 승하한 이후에는 강의도 이루어지지 않고 심지어

절의 재물을 빼돌리는 자들도 있었다. 충숙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1333년에

의선을 보은광교사의 주지로 초빙하였다. 의선은 이곳에서 천태교학의 강의를

재개하였고 사찰을 보수하고 확장하여 충선왕의 유지를 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三藏法師)라는 법호를

받은 상태였다. 무종대의 석사라바와 석달익바 삼장에 이어, 토번승이 아닌 고려승

으로서 삼잡법사에 피봉된 것이다. 의선이 받은 ‘정과 혜에 두루 통하고, 지견에

막힘이 없는 삼장법사’라는 법호는 그가 불교학에 두루 뛰어난 승려였으며, 또

경전을 번역하고 보급한 공이 큰 승려였음을 알게 한다.

 

의선이 삼장법사로 피봉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천태승으로서의 탁월한 실력과 아울

러,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이하 미타참법)을 중각하고 널리 보급시

킨 공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1332년 대천원연성사에서 자신의 재산과, 인연 있는

중생들이 낸 기부금을 모아,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을 예참하는 도량의식집

인 미타참법을 중각하여 대장경에 포함시키는 등 실천적이면서 민중적인 불교의

홍보를 위해 애썼다.

 

의선이 미타참법을 중각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료는 대도의 대각사(大覺寺) 주지인

일본승 지도(至道)가 쓴 예념미타도량참법의 중간본 서문(海印寺本, 충혜왕 2, 至順

三年七月)이다. 원래 10권으로 된 미타참법은 금(金)의 극락거사(極樂居士) 왕자성

(王子成, 혹은 王慶之)이 1213년에 정토의 인연력을 모아 엮었다. 그는 서문에서

‘양무제의 참법의 의궤에 의존하여 미타의 가르침의 공덕을 상세히 밝힌다. 천불은

갖추어져 늘어서 있고, 성스러운 무리는 모두 나타난다.’하였다. 즉 참회를 바탕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참은 참마(懺摩), 즉 인(忍)을 뜻하며, 회(悔)는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불보살과

대중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참회로 끝나지 않고

그 끝에 발원을 통해 새 업을 서원하는 수행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 방법으로는

참법을 기록한 각종 의식문을 읽으며 절차에 따라 참회하거나, 절·염불·경전독송·

사경 등을 통해 하기도 한다. 참법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따르면서 지은 죄를 참회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으로, 정토신앙과 말법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를 말법시대로 규정한 왕자성은 정토왕생을 발원하고 염불과 참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념미타도량참법의 사이사이에 염불과 발원문을 두어

참회의식에 사용하였으며‚ 게송 뒤에는 『관무량수경』·『왕생전(往生傳)』 등 여러

불서에서 인용한 주석을 달았다.

 

특히 원 간섭기의 고려불교에서는 말법의식의 영향으로 참회가 강조되었다. 혜영(惠

永)의 백의예참회(白衣禮懺解)나 미수(彌授)의 자비도량참법술해(慈悲道場懺法述

解)와 같이 법상종(法相宗) 중심으로 참회에 관한 서적이 다수 간행되었다. 천태종

승려인 의선은 중국과 고려 불교계 전반에 유행하던 정토신앙과 말법의식 및 참회의

영향으로 이 책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16·17세기의 판본에 의해서 미타정토신앙

과 참법은 조선중기에도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극락정토에의

왕생을 기원하여 아미타불을 예참하는 도량 의식집이므로, 의선이 실천적이면서

민중적인 불교의 홍포를 위해 애썼던 것을 알 수 있다.

 

천태종과 화엄종, 티베트 불교는 같은 불교이면서도 전래된 시기나 지역에 따른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선의 불교

사상을 고찰하는데 있어 티베트 불교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원 황실에서는 황실사원의 신어전에서 선제의 축리를 위한 고승을 모시는 것을

중시하였기에, 고려 묘련사에서 익히 보아왔던 영당에서의 축리에 익숙했던 의선이

환영받을 수 있었던것이다. 게다가 고려 천태종이 지니는 국가비보사상이 원 황실의

주목을 받았고, 고려승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더욱 컸기에 의선을 비롯한 여러

고려승이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Ⅴ. 맺음말

 

고려 후기의 대표적 권문세족인 조인규가 출신의 의선의 생애와 불사(佛事), 삼장법

사 사호(賜號) 배경 등을 살펴보았다. 조인규의 4남으로 출생한 의선은 어린 나이에

묘련사로 출가하였고, 묘련사·진구사·만의사·영원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여·원불

교교류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의선 만큼 여

러 사찰의 주지를 오랫동안 중임하며 본국과 중국에서 활동한 승려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선이 대도로 가서 활동을 한 배경에는 충선왕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임을 짐

작할 수 있다. 충선왕은 1308년부터 황실의 불사에 대표로 참여하여 황태후, 황태자

와 함께 오대산 순례를 하거나, 강남의 보타산에 가서 강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원의

주요 사찰 50여 곳에 대장경을 조인하여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기진하는 등의 각종

불사를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의선은 충선왕의 처남이면서, 불교와 유교에 대한 실력

이나 승려로서의 자질도 뛰어나, 충선왕을 통해 원 황실에도 고승으로의 면모가 알려

졌을 것이다.

 

충선왕이 토번으로 유배를 간 후 의선은 대도에서 활동하였고, 마침내 1332년, 대

도에 있는 황가 사찰 대천원연성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예념미타

도량참법』을 중각·유포하며 대장경에도 편입시켰는데, 이 일은 그가 삼장법사라는

법호를 받게 된 직접적 이유로 보인다. 1333년에는 충선왕이 창건한 대도의

대보은광교사의 주지도 역임하였다. 의선은 1336년 강향사(降香使) 자격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불은사·묘련사를 중수하였다. 1338년에는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사

삼대광자은군(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師三大匡慈恩君)에 봉하여졌으며 영원사

(瑩原寺)주지를 겸하였다. 그는 다시 대도로 돌아가서 활동하였으며,

원 황제의 은총을 입고 종문을 빛냈다.

또 그는 고려 국왕의 특대를 받아 1만 승려의 영수라는 평을 받았다.

 

1354년, 진사 이색(1328~1396)은 묘련사에서 승려와 유림들이 자주 모여 차와

문장을 나누었던 모임을 회상하였다. 또 다른 문인인 한수(1333~1384)도

‘少小就妙蓮, 讀書五寒署’라는 시구를 통해 당시의 묘련사에서 행해졌던 문인들의

모임을 전한다. 의선은 135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다른 형제들이 정치권력의 핵심에

서 활동하며 성공한 것에 비해, 평생을 예불하며 출세간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의선이 천태승임에도 티베트 불교사원인 대천원연성사의 주지가 된 데에는 원 황실

과 충선왕, 조인규가의 특별한 관계 외에, 원 정부의 종교 정책의 영향도 있었다. 원

불교계는 교학에 충실한 티베트 불교를 가장 위에 두고, 한족의 선불교 세력을 억누

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율에 충실하고 호국의 공능이 크다고 알려진

고려승들은 토번승 다음으로 중시되고 존경을 받았기에, 많은 고려승들이 원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쿠빌라이-충렬왕-조인규-의선과, 충선왕-조인규-조비-의선으로 연결되는 탄탄한 속

가 배경에, 승려로서의 탁월함까지 갖춘 의선은 마침내 삼장법사라는 영예로운 법호

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장법사 의선은 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으로 이어지

는 고려와, 쿠빌라이-성종-무종-인종-영종-태정제로 이어진 원 황실의 화합과 대립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두루 인정받은 고승이었다.

 

【참고자료】

1. 원서

『禮佛彌陀道場懺法』

『元史』

『高麗史』

李穀, 『稼亭集』

李穡, 『牧隱集』

李齊賢, 『益齋亂藁』

徐居正 編, 『東文選』

金龍善(1993), 『高麗墓誌銘集成』, (춘천: 한림대학교출판부)

許興植(1984), 『韓國金石全文』, (서울: 아세아문화사)

2. 단행본

桂美香(2021),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 (서울: 문현출판사).

陈景富(1999), 『中韩佛教关系一千年』, 宗教文化出版社出版.

채상식(1991), 『高麗後期佛敎史硏究』 (서울: 일조각).

何勁松(1999), 『韓國佛敎史』下卷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황인규(2011), 『고려시대불교계와 고려문화』 (서울: 국학자료원).

-----(2003), 『고려후기·조선초 불교사 연구』 (서울: 혜안).

허흥식(1995), 진정국사와 호산록 (서울: 민족사).

3. 논문

강호선(2000), 「원간섭기 천태종단의 변화」, 『九山論集』제5집.

고익진(1979), 「백련사의 전통사상과 천책의 저술문제」, 『불교학보』제16집.

桂栖鵬(2001年02期), 「入元高麗僧人考略」, 西北师大学报(社会科学版).

小川裕充, 「北宋時代の神御殿と宋太祖`仁宗坐像について-その東アジア世界的普遍性」, 『国華』一二五.

五号、二○○○年).

윤기엽, 「在元 高麗人 관련의 大都寺院」, 『불교학 연구』11호.

張言夢(1999), 「元代來華高麗僧人考述」, 『内蒙古社会科学(汉文版)』.

蔡尙植(1999), 「無畏國統 丁午의 活動相과 思想的 傾向」, 釜大史學 23.

최기표, 천태역대조사, 22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의선(義旋), 금강신문.

황인규(2000), 「고려후기 백련결사 정신의 변질과 계승」.

(1998), 「조인규가문과 수원 만의사」, 『수원문화사연구』2.

許正弘(2010), 「元·高麗僧義璇生平事跡考」, 國立淸華大學歷史硏究所98學年度硏 究生論文發表會.

 

「고려 의선(義璇)의 삼장법사 법호 고찰」에 대한 토론

 

이기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이 논문은 고려 충렬왕대 천태승 순암의선에 대한 법호 고찰이다. 의선은 고려 명

문가로 꼽히는 조인규의 5남 4녀중 제4자로 원혜국통의 직제자이고, 무외국통은

백부이다. 그는 묘련사에 출가하여 원나라에서 활약하였으며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三藏法師)의 호를 받았다.

이 논문은 의선이 이 법호를 받게 된 경위와 이 법호의 의의를 고찰하였다.

 

삼장법사의 법호는 원대 불교사에서 3인이 보인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 승려인

석사라바(釋沙囉巴)와 석달익바(釋達益巴), 그리고 고려의 의선이다. 이중에서

석사라바와 석달익바는 충선왕이 원 황실의 일원으로 다양한 불교 활동을 했던

무종때 삼장법사의 법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무종과 인종대에 걸쳐

경수사에 주석하며 황실가족에게 관정을 하고 법요를 가르쳤다. 이에 비해 토번승도

아니고 파스파의 제자도 아닌 고려 천태승 의선이 그들과 나란히 삼장법사 법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의선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의선이 법호를

받게 된 배경에는 선종의 한족 승려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반면에 티베트 불교

승려가 가장 존중을 받았고 그 다음으로 고려승이 존숭되었기 때문인데, 고려승들이

계율을 잘 지키고 현세에서 축원의 공능이 뛰어나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문에서는 의선이 삼장법사의 법호를 받게 된 배경에 대해여 몇가지 사실을 제시

하고 있다. 원 황실의 총애와 신뢰를 받았던 부친 조인규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의 후원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첫째는 충선왕의 후원이다. 충선왕은 원 갑섭기 충렬왕(1236-1308)과 제국대장공주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의 왕자로 1289년 왕위에 올랐다가 ‘조비무고사건’으로 퇴위

당하고 대도로 가서 10년간 카이산(무종), 아유르바르와다(인종) 형제와 한집에서 지

냈고 이들이 황위를 계승하면서 원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충선왕(왕

비는 계국대장공주, 1297년 사망)은 1317년 대도에 대보은광효사(大報恩光孝寺, 후의

大報恩光敎寺)를 지어 1319년에 낙성된 이 사찰에서 항주의 천태종 승려를 초빙하여

천태교학을 강의하게 하였고, 화엄종 승려에게 주지를 맡기기도 하였다. 충선왕 사후

인 1333년에는 의선이 보은광교사의 주지로 초빙되어 천태교학의 강의를 재개하였고

사찰을 보수하고 확장하여 충선왕의 유지를 이었다.

 

둘째는 의선이 불교학에 뛰어난 승려로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을

중각하고 널리 보급시킨 공 때문이라고 한다.

 

의선의 법호인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三藏法師)는 ‘정과 혜

에 두루 통하고, 지견에 막힘이 없는 삼장법사’라는 뜻으로, 그가 불교학에 두루 뛰어

난 승려였으며, 또 경전을 번역하고 보급한 공이 컸기 때문에 이 법호를 받은 것이라

고 한다. 의선은 1332년 대천원연성사에서 자신의 재산과, 인연 있는 중생들이 낸 기

부금을 모아,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을 예참하는 도량의식집인 미타참법을

중각하여 대장경에 포함시키는 등 실천적이면서 민중적인 불교의 홍포를 위해 애썼

는데, 이러한 노력이 인정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의선은 1338년에는 복국우세 정명보

조 현오대사 삼대광자은군(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師三大匡慈恩君)에 봉하여졌다. 영

원사(瑩原寺)등의 주지를 역임하고 다시 대도로 돌아가서 활동하였으며, 원 황제의 은

총을 입고 천태종문을 드날렸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국왕의 특대를 받아 1만 승려의

영수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셋째는 원 황실의 총애와 신뢰를 받았던 부친 조인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고려가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가면서 개경에는 왕실과 제국대장공

주가 발원하여 창건한 묘련사가 창건되었다. 백련사시대 이후 천태종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묘련사는 원혜국사가 왕의 뜻을 받들어 초대 주맹이 되어 『법화경』·『법화문

구』·『법화현의』 등을 강의하며 묘련결사를 주도하였다. 원혜는 무외국통 정오의 법형

인데, 정오는 조인규의 형 혼기(混其)이다, 그는 진구사 주지이며 만의사를 중창하였

다. 정오는 1306년에 대선사, 1307년에는 왕사로 책봉되고,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에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禪敎各宗山門道伴總攝調堤)가 되었다. 1309년에는 천태

종 본산인 국청사에 주석하였고, 1313년에는 국통으로 임명되었다. 정오는 1314년에

는 영가종의(永嘉從義)의 주석서인 천태사교의집해(天台四敎儀集解)를 개판·유통하

는데, 1315년의 국청사 낙성법회에서는 법화예참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이런 서적

의 편찬은 교학을 중시한 묘련사의 사상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의선이 원의 대천원연성사에서 편찬한 『예념미타도량참법』도 이러한 연장선으

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여 조인규 가의 후광이 그가 삼장법사의 법호를 받게 배경으

로 보는 것이다.

 

이 논문은 의선의 법호고찰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시기 고려 천태종의 입장에

서 보면 천태종의 종단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향후 고려 천

태종 연구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논자는 몇가지 자세한 설명을 듣

고 싶은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써 논평의 소임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첫째, 머리말에서 “그러나 의천의 입적 이후 천태종은 약화되었고, 고려 후기에 이

르러서는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다.”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종파의 변화를 보면, 고려후기 종파가 11종에서 조선초 7종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는데 이때 고려후기에 천태법사종 천태소자종의 2종파나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최후의 국사 조구(祖丘)는 천태종 출신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

후기에 천태종파가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로만 볼 수 없다는 반증으로 보입니다.

논문의 머리말 후반부에서는 “백련결사운동으로 천태종이 다시 확장되었다”

고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의선이 충선왕의 후원을 입어 삼장법사의 법호를 받았다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의선은 1332년에 황제에게서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

三藏法師)의 법호를 받고 대도 대천원연성사(黑塔寺)의 주지로 임명 되었다고 합니

다. 그런데 충선왕은 1320년에 토번으로 유배가서 1325년에야 대도에 돌아와 그해

사저에서 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선이 법호를 받은 1332년과 7년여의

기간이 지난 후의 일이어서 과연 당시까지 충선왕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또한 의선의 불교학적 노력과 함께 삼장법사의 자격이 될만한 업적으로

대천원연성사에서 중각한 『예념미타도량참법』도 1332년의 일입니다.

 

셋째, 묘련사기의 중요한 고승인 정오가 “1309년에 천태종 본산인 국청사에 주석하

였고, 1313년 국통으로 임명되었으며, 1314년에는 영가 종의(永嘉從義)의 주석서인

『천태사교의집해(天台四敎儀集解)를 개판·유통하였다. 또한 1315년의 국청사

낙성법회에서는 『법화예참』을 편찬하였는데 이런 서적의 편찬은 교학을 중시한

묘련사의 사상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선이 원의 대천원연성사

에서 편찬한『예념미타도량참법』도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강호선 앞의 논문, pp.140~141).라고 하고 있습니다.

 

논자는 이 부분의 고찰이 매우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고려 후기 천태종파가 천태

법사종과 천태소자종으로 분열된 것을 이 부분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련사기

에 비해서 묘련사기는 천태의 주소(註疏)를 중시하여 이 시기에서 천태소자종이 분파

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곧 묘련사기는 고려 독자적인 傳天台敎觀天幕

沙門 山亘撰 (妙法蓮華經三昧懺法)三卷(충숙왕13, 월산사개판)이라는 법화삼매집을

사용하였고, 註疏로 법화삼매참조선강의(우왕4, 1378 영암사 주지묘해 발문)가 찬술

되었으며, 요원의 법화영험전이 신행서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백련사결

사기는 법화삼매의 실천 수행에 치중한 천태법사종으로 비정하고, 묘련사기를 법화

삼매 주소에 중점을 둔 천태소자종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 어떤 견해가 있으신지요.

 

*참고: 각주 “천태 지의의 『法華三昧懺儀』를 해석한 『法華三昧懺助宣講儀』는

1378년에 靈巖寺 주지 妙慧가 간행한 것이다. 간행 당시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 龍

岩寺 주지 요원(了圓)이 동참하였다.”에서 『法華三昧懺助宣講儀』는 천태 지의찬 『法

華三昧懺儀』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고려 산긍찬 妙法蓮華經三昧懺法의 해석입니다.

최근 알려진 이 강의집 상권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자 : 계미향 교수

발 표 : 계미향(한국불교선리연구원)

토 론 : 이기운(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주 석 : 이 논문은 동국대학교 교수 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계미향 교수님 연구 논문으로,

         교수님의 동의을 얻어서 삼장법사 의선의 글을 올립니다. 

         젊은 종친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난해한 한자와 일부 내 수정하였습니다.

 

작성자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