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고려국(高麗國)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 중흥기(重興記)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율장(律藏), 경장(經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이 유일하다.

 

불은사(佛恩寺)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비슬산(琵瑟山)에 있었던 고려 왕들이 자주 행차한 사찰.

삼장법사 자은군 의선(義旋)이 원의 연성사(延聖寺)와 광교사(光敎寺), 영원사(塋原寺) 주지와 더불어 

불은사 주지로 재임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병이 들자 불은사 약사여래상에 기도하여 완쾌되었으며, 

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20여 년간 장륙불(丈六佛)과 보살상을 조성하고 불전(佛殿)을 크게 지었으며, 

1338년(충숙왕 복위 7) 가을에 회향 법회를 크게 열었다. 의선의 문도이자 대사도(大司徒)에 책봉된 

희암(熙菴)도 불은사에 주지로 재임하였다. 1298년(충렬왕 24)에는 충선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영궁기지

(營宮基地)를 보고 덕자궁(德慈宮)을 건립하였는데, 이후 충렬왕은 보위에서 물러나 이곳에 거주하였다.

 

高麗國天台佛恩寺重興記

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大天源延聖寺,大報恩光敎寺兼高麗瑩原寺住持。

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三重大匡慈恩君旋公。奉天子之命。來使本國。

以至元戊寅秋。將還朝。邀余於所館之佛恩僧房。煮茗而言曰。昔吾延祐甲寅。

在王京遘疾。藥療無效。廼禱于玆寺之藥師。其夜夢神人授靈丹服之。明日疾卽愈。

因誓以死奉其敎曰。人患不誠。誠能動物。况于藥師之靈應乎。實自其年施財雇工。

塑金色丈六幷二菩薩。繼新大殿以覆佛。廣堂廡以居僧。噫。今餘二十年。工始告畢矣。

吾幸來而督成之。寺成而吾又去。宜載本末于石。而成吾之志。子爲吾記之。

余惟佛氏之道至矣。其言宏闊勝大。而罪福之說。能有以動人之心。故其敎盛行於天下。

而東方事之彌篤。人無智愚老幼。皆知有佛。凡死喪患難。動輒號之。謂非佛。

若不能一日於世者。故佛刹相望。幾半於人家。然皆好於刱新。而折幢破礎。

人莫之顧。本寺自光王時爲藥師道塲。邦家賴之。厥後燬于兵。小東而屋之。

以襲其名。今幾百年。而公能闢舊址而新之也。抑世之爲塔廟。或丐錢於官。

借力於民。因而有病國者。公則不然。竭其所儲。幷其己有。經營勤劬。磨以歲月。

迄用有成。此其可書者也。公以衣冠貴胄。而能勇於謝世。旣而入中國。知名儒釋間。

遂荷天眷而膺恩命。光耀宗門。名標國史。又承國王待遇之重。進階一品。

俾冠僧流。眞所謂領袖萬僧者矣。人固有得意而渝其志者。公出入中外。榮寵如此。

而居輦轂亦且十五年。其於扶持宗敎。興復玆寺。未甞一日忘于懷。此又可書者也。

若夫土木之工程常事也則不書。寺不 a003_115d知刱於何代。舊名留岩。光王日齋。

僧常有數。一旦少其一。邀於路。獨有形䫉醜甚者。姑致之座下。左右戱之曰。

末比丘。勿說赴齋王宮。僧曰。爾亦勿言親見藥師。言訖。躡空而去。卒隱留岩井中。

王於是大其寺而崇信之。始改其額。而國人相傳云。

 

고려국(高麗國)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 중흥기(重興記)

 

가정집 제3권 / 기(記)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의 호를 특별히 하사받고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와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의 주지(住持)와 

고려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를 겸한 주지를 겸한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 대선사

(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자은군(慈恩君) 선공(旋公)이 천자의

천자의 명을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왔다가 지원(至元) 무인년(1338, 충숙왕 복위 7년)

장차 조정으로 돌아가려 할 즈음, 관소(館所)로 정한 불은사(佛恩寺) 승방으로

나를 초청하여 차를 끓이면서 말하기를,

 

“옛날 내가 연우(延祐) 갑인년(1314)에 왕경(王京)에 있을 적에 병에 걸렸는데 약을 먹고 

치료를 해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이 절의 약사여래(藥師如來)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영단(靈丹)을 주기에 복용하였더니, 그 다음 날에 

병이 즉시 나았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가르침을 받들겠다고 죽음으로 맹서하면서

‘사람이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 걱정이지,

정정성스럽기만 하다면 어떤 것도 감동시킬 수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 응험이 신령스러운 약사여래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실제로 그해부터 재물을 시주하고 공인(工人)을 고용하여 황금색의 장륙(丈六)과 

과 두 보살(菩薩)1)을 조성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대웅전을 신축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당무(堂廡)를 확장하여 승려들을 거하게 하였다.

아, 이렇게 해서 20여 년이 지난 지금 공사가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행히 이곳에 와서 낙성(落成)을 독려(督勵)하게 되었고, 

사원이 낙성되면서 내가 또 떠나게 되었으니,

이 일의 본말을 돌에 새겨서 나의 뜻을 이루고 싶다.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달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지극한데,

그 말이 광대하고 거창한 데다가 죄와 복을 받는다는 설이 사람의 마음을 꽤나 

움직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천하에 성행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경우는 불씨를 더욱 독실하게 신봉하는 까닭에,

지우(智愚)나 노유(老幼)를 막론하고 사람들 모두가 불씨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사상(死喪)이나 환난을 당할 때면 으레 부처에게 호소하면서 부처가

아니면 하루도 이 세상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찰(佛刹)이 서로 바라다볼 수 있을 만큼 이어져서 인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새로 짓는 것만을 좋아할 뿐이요,

당간이 부러지거나 초석이 깨어져도 사람들이 그런 것은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본사(本寺)는 광왕(光王 광종(光宗) ) 때 약사여래의 도량이 되면서부터 국가의 의지처가

되었는데, 그 뒤에 병화로 소진되었으므로 위치를 조금 동쪽으로 옮겨 건물을 짓고는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다가 지금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나서

공이 다시 옛터를 닦아 신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탑묘(塔廟)를 만들 적에 관청에 돈을 구걸하기도 하고, 

백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들이 있는데, 

공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동안 비축해 둔 물자는 물론이요 

자기의 소유까지도 모두 희사해서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공들인 결과 이제 낙성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기록해 둘 만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공은 대대로 벼슬을 한 귀족의 후예로서 용맹심을 발휘하여 속세의 영화를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중국에 들어가 유자와 불도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마침내는 천자의 은총을 입고 은명(恩命)을 받아 종문(宗門)을 빛내는 한편 이름을 

국사(國史)에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융숭한 대우를 받고서

1품의 직질(職秩)로 뛰어올라 승류(僧流)의 어른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만승(萬僧)의 영수(領袖)가 된 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일단 뜻을 얻고 나면 처음에 품은 뜻을 저버리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공의 경우는 중외(中外)에 출입하면서 이처럼 영광과 은총을 입었고 

또 경사(京師)에 산 지도 15년이 되어 가는데, 종교를 부지(扶持)하고 이 사원을 중흥하려는 뜻을

하루도 가슴속에서 망각한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기록에 남겨 둘 만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기타 토목의 공정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이 사찰이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예전에는 이름을 유암(留岩)이라고 하였다. 

광왕(光王)이 날마다 이 절에서 재(齋)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참여하는 승려의 숫자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승려 한 사람이 모자랐으므로 길에서 한 명의 승려를 불러들였는데,

유독 생김새가 매우 추악하였으나 우선 그를 자리 아래에 앉게 하였다.

그러자 좌우의 승려들이 그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막내 비구야, 왕궁의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그 승려가 “너희들도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친견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마침내 유암사의 우물 속으로 몸을 감췄다고 한다.

왕이 이에 그 절을 크게 확장하고 신봉하며 마침내 불은사라고 이름을 고쳤다는데,

이는 국인(國人) 사이에 서로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1) 장륙(丈六)과 두 보살(菩薩) : 장륙은 부처의 별칭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전(西域傳) 천축(天竺)에

   “서방에 부처라는 신이 있는데, 그 모양을 보면 신장이 1장 6척에 황금색을 띠고 있다.

   〔西方有神 名曰佛 其形丈六尺而黃金色〕”라는 말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보살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좌우 협시보살(夾侍菩薩)로서 각각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을 가리킨다.

 

판독자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출   처 : 가정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자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