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 |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등 |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다. |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율장(律藏), 경장(經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이 유일하다. |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 |
삼장법사 의선과 익재 이제현이 금강산에서 불공을 드리고 강릉 한송정에서 한가로이 차를 마시다. |
석지조(차를 끓이는 돌로 만든 도구1)를 발견하고 의선스님이 출가했던 묘련사에서 어릴 적 본 |
석지로를 기억해내고 묘련사로 돌아와 석지조를 찾은 후 이를 기념하여 의선의 의뢰로 이제현이 지은 기록. |
이제현은 어릴 적 부친을 따라 무외국사의 문하에 드나들며 어린시절부터 의선 스님과 어울렸다고 한다. |
의선 스님은 무외국사(無畏國師)의 조카이다. |
기록 한문 원본 |
妙蓮寺石池竈記 |
三藏順菴法師奉天子之詔。祝釐于楓岳之佛祠。因游寒松之亭。其上有石池竈焉。訊之土人。 |
訊之土人。蓋昔人所以供茗飮者。蓋昔人所以供茗飮者。而不知作於何代。師自念曰。 |
幼時嘗於妙蓮寺。見二石草中。想其形製。豈此物耶。及歸。及歸。物色而求。果得之。 |
果得之。其一。方刳之如斗爲圓。其中如臼。所以貯泉水也。下有竅如口。啓以洩其渾。 |
塞以畜其淸也。其一則有二凹。圓者所以厝火。橢者所以滌器。亦爲竅差大。以通凹之圓者。 |
所以來風也。合而名之。所謂石池竈也。於是。命十夫轉置之宇下。邀賓客列坐其 次。 |
挹白雪之泉。煮黃金之芽。因謂益齋曰。昔。崔靖安公嘗爲雙明耆老會。其地於今寺之北岡。 |
去寺數百步而近。此其當時物歟。牧菴無畏國師住錫玆寺。有若三菴。日嘗往來。一經題品。 |
價必三倍。迺爲榛穢所掩沒。自雙明迨今幾二百年。始爲吾一出。而效用於前。 |
請爲記以慰其不遇。而慶余之能得也。竊惟雙明之會。有李學士眉叟。凡一草木之微。 |
苟可以資談笑。皆載之詩文。今考其集中。未見一語及此。何耶。 |
其後亦未聞好事如崔太尉兄弟者。來家于此。石之爲池 竈。其在於雙明之前。 |
而與夫寒松亭者。未知孰爲先後也。蓋其晦而不遇也久矣。豈獨于三庵。其于眉叟。 |
亦未之遇也。然而晦於幾三百年之前。而現於一朝。雖眉叟,三庵之未遇。而有師之遇。 |
若有所謂數者存乎其間。物之與人。常相爲其名焉。柯之笛豐之劍。待邕,煥而著稱。 |
固也。二子之鑑識。爲千載所服膺。亦以夫二物也。師伐氷華胄也。雖圓其顱。 |
而素富貴者也。今爲天子之使。一國之主敬愛之如師友。顧乃與騷人墨客逍遙乎風月之場。 |
其襟度可見矣。將使後之 不及見者。聞其名而知其心之二石也。豈亦邕煥之笛,劍歟。 |
至元三年丁丑秋夕。益齋李某。記。 |
익재난고(益齋亂藁) 제6권 / 기(記) |
묘련사(妙蓮寺) 석지조(石池竈) 기(記) |
삼장(三藏) 순암법사(順菴法師)가 천자의 분부를 받들어 풍악(楓岳)의 불사(佛祠)에서 복을 빌고는 |
인하여 한송정(寒松亭)2)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곳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지는 몰랐다. |
법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렸을 적에 일찍이 묘련사에서 두 바윗덩이가 풀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
그 모양을 상상컨대 어쩌면 이것이 아닌가 하고, 돌아오자 물색하여 찾아보니 과연 있었다. 그 중 하나는, |
사방을 말[斗]처럼 모나게 다듬고 가운데를 확처럼 둥글게 팠으니 이는 샘물을 담으려고 한 것이며, |
밑에다 주둥이처럼 구멍을 냈으니 이는 열고 찌꺼기를 씻어낸 다음 다시 막아 맑은 물을 담는 것이었다. |
또 하나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 데는 물을 담는 것이고, 타원형인 데는 그릇을 씻는 것이며, 또한 조금 크게 구멍을 |
둥근 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는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
백설(白雪)처럼 시원한 샘물을 끌어다가 황금빛의 움차를 끓이면서 익재(益齋)에게 하는 말이, |
“옛적에 최 정안공(崔靖安公)3)이 일찍이 쌍명(雙明)4)을 위하여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는데, |
그 자리가 지금의 절 북쪽 등성이로 절과의 거리가 몇백 보(步)쯤 되니, |
이는 그 당시의 물건이 아니겠는가? |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머무를 때, 삼암(三菴) 같은 분이 날마다 왕래했으니, |
한 번 품평[題品]받았으면 반드시 값이 몇 갑절이나 나갈 것인데, |
마침내 우거진 잡초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
쌍명이 있던 시대가 지금 거의 2백 년이나 되는데, |
비로소 나를 위해 한 번 나타나 앞에 두고 보람 있게 쓰이니, |
바라건대 기를 지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고, 나의 구득을 축하해 주오.” 하였다. |
나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쌍명의 기로회에는 이학사(李學士)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의 |
자(字)가 있어서 모든 미미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진실로 담소(談笑)거리가 |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문(詩文)에 실었었는데, 지금 그 문집을 상고해 보건대, |
이에 언급한 것이 하나도 없음은 무슨 일이며, 그 뒤에도 |
또한 최태위(崔太尉) 형제처럼 일을 좋아한 사람이 여기 와서 지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
이 돌이 지조(池竈)가 된 것은 쌍명 이전이어서 한송정과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
대개 매몰되어 불우한 지 오래니 어찌 삼암뿐이리요, 미수 역시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거의 3백 년 전에 매몰되었다가 하루아침에 발견되어 |
비록 미수나 삼암은 만나지 못했지만, |
법사를 만나 마치 그 사이에 소위 운수라는 것이 존재한 듯하니 |
물건과 사람은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이름나게 되는 것인가보다. |
가정(柯亭)의 젓대[笛]와 풍성(豐城)의 칼이 |
채옹(蔡邕)과 뇌환(雷煥)을 만나서야 이름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두 사람의 감식(鑑識)이 천 년토록 탄복받음도 또한 두 가지 물건 때문인 것이다. |
법사는 공경(公卿) 가문의 귀족으로 비록 머리를 깎은 중이긴 하지만 본래 부귀한 분이다. |
이제 천자의 사신이 되어 한 나라의 임금이 사우(師友)처럼 경애(敬愛)하는데도, |
도리어 소인(騷人 문인)ㆍ묵객(墨客 서화가)과 풍월(風月)을 찾아 노니니, |
그의 흉금을 알 만하다. 장차 뒷날의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
그 이름만 듣고도 그의 마음에 두 덩이 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
어쩌면 또한 채옹과 뇌환의 젓대와 칼일 것이다. |
지원(至元) 3년 추석(秋夕)에 익재 이 아무는 기한다. |
1) 석지조(石池竈) : 돌로 만든 차를 끊이는 도구. 묘련사에 있는 석지조를 말함. |
2) 한송정(寒松亭) : 경포대 근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 3리 있는 정자.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차 유적지로 |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인 사선(四仙)이 차를 달이던 석지조(石池竈)가 강릉 경포대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
3) 최당(崔讜) : 본관은 창원(昌原) 고려 태조(太祖) 때의 공신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
쌍명재(雙明齋)를 설치하였고,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와 술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으로 불렸다. |
4) 쌍명(雙明) : 이인로(李仁老) 본관은 인천(仁川) 학자며 시인이자,작가로 자는 미수(眉叟) 아호는 쌍명재(雙明齋) |
저술한 파한집(破閑集)은 한국 최초의 시화집이다. |
판독자 : 김용국 |
출 처 : 익재난고(益齋亂藁) 제6권 기(記), 한국학중앙연구원. |
주 석 : 6世 의선이 말한 석지조를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에서 복원하여 한송정(寒松亭) 부근에 설치함. |
동문선 제69권 / 기(記) |
묘련사 석지조 기(妙蓮寺石池竈記) |
이제현(李齊賢) |
삼장순암법사(三藏順奄法師)가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금강산(가을에는풍악산楓岳山) 절에 불공드리고서 |
그 길로 강릉의 한송정(寒松亭)을 유람하였다. |
그 위에 석지조(石池竈)가 있으므로 주민에게 물으니, 이는 옛날 사람들이 차를 끓여 마시던 것인데, |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
법사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어릴 때 일찍이 묘련사(妙蓮寺)에서 두 개의 돌이 풀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
그 형상을 생각하면 이런 물건이 아니었던가 하였다. |
그리고 돌아와서 찾아 보니 과연 있었는데 |
그 한쪽은 네모나게 갈라서 말(斗)처럼 만들고 그 가운데를 둥글게 하여 절구(臼)와 같으니 샘물을 담는 것이고, |
그 아래에는 구멍이 있어 입(口)과 같으니, 흐린 물을 나가게 해서 맑은 물을 고이게 하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두 곳이 움푹한데 둥근 것은 불을 때는 곳이고 길쭉한 것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
또 구멍을 조금 크게 하여 움푹하게 하였는데 둥근 것은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으로, |
합하여 이름하면 석지조(石池竈)라는 것이었다. |
이에 10명의 인부를 시켜 굴려다 지붕 아래에 놓고 손님을 초청하여 거기에 둘러 앉게 한다음 |
백설같은 샘물을 길어다 황금같은 차를 끓이면서 익재(益齋)에게 말하기를, |
“옛날 최정안(崔靖安) 공이 일찍이 쌍명기로회(雙明耆老會)를 열었는데, |
그곳이 지금 이 절의 북쪽 산으로 절에서 가깝기가 수백 보이니 이것이 그 당시의 물건인지요? |
목암(牧菴)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거주하였으니, |
삼암(三菴) 같은 이가 일찍이 왕래한 일이 있고, |
한번 글로 평가하였다면 이 물건의 값이 반드시 3배는 되었을 것인데, |
어찌하여 무성한 숲속에 묻혀 있게 된 것이요? |
쌍명회로부터 지금까지는 2백년이나 되는데, |
처음으로 나를 위하여 한 번 나와서 앞으로 소용이 되게 되었으니, |
기문을 써서 그 동안 이 물건이 불우했던 것을 위로하고 내가 얻은 것을 경축하여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
가만히 생각하니, |
쌍명회합에 대해서는 이학사(李學士) 미수(眉叟)라는 이가 있어서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도 |
그것이 담소(談笑) 거리가 될 만한 것이면 모두 시와 문장에 적었는데, |
지금 그 문집 속에서 찾아 보아도 이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
그 후에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기로 최 태위(崔太尉)의 형제같은 이가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말을 아직 듣지 |
못하였다. 이 돌이 지조(池竈)로 된 것이, 쌍명회 이전의 일이라면 |
저 한송정의 것과 어느 것이 먼저가 되고 뒤가 될지 모를 일이니 대개 그것이 파묻혀서 불우해진 지가 오래된 것이다. |
어찌 삼암에게 뿐이리요. |
미수에게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거의 3백년 전에 파묻혔다가 하루 아침에 나타나 삼암이나 미수와도 만나지 못하였으나, |
법사와 만나게 되었으니 만나는 것도 이른바 운수라는 것이 그 사이에 있는 것 같다. |
물건과 사람이 항상 서로 이름을 내는 것으로서 |
가(柯)의 피리와 풍(豐)의 검이 옹(邕)과 환(煥)을 기다려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
원래 두 사람의 알아보는 식견이 천 년 후에도 본받을 만하지만 이름난 것은 역시 두 물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
법사는 벼슬하는 명문의 자손으로,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는 하였지만 원래는 부귀한 사람이었다. |
지금 천자의 사신이 되어 와서, 한 나라의 임금으로도 경애(敬愛)하기를 사우(師友)같이 하는데, |
도리어 시인(詩人)이나 문장가들과 음풍영월(吟風詠月)하는 곳에 거닐고 있으니, 그 도량을 알 만한 일이다. |
장차 뒷날 오늘 일을 미처 보지 못한 이들로 하여금 |
그 이름을 듣고 그 마음 가운데의 두 개의 석물(石物)을 알게 하려 하는 것이니, |
이것이 어찌 옹과 환의 피리와 검과 같은 것이랴. |
판독자 : 김용국 |
출 처 : 동문선 제69권 기, 한국학중앙연구원. |
주 석 : 익재난고와 동문선 판독자는 동일하나 한글 내용이 미묘하게 상이해서 모두 등록함. |
작 성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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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7 01:02
6世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묘련사석지조기(妙蓮寺石池竈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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