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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조일신(趙日新) 초명은 조흥문(趙興門)

 

조일신은 모친이 고려인이라 왕이 되기 힘든 왕기(王祺공민왕)를 원의 수도인 대도에서 10년간 충성을 다해 모셨다.

왕기의 형인 충혜왕(忠惠王)의 장남인 8살의 충목왕(忠穆王)이 왕이 되었다가 병으로 요절하고, 조일신은 왕기가 왕이

되길 원했으나, 원은 또 나이 어린 12살 충정왕(忠定王)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왕기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왕기를 떠나갔다. 충정왕은 즉위 3년만에 원에 의해 왕위를 왕기에게 내주게 되었고, 왕기가 공민왕이 될

수 있었다. 22살의 젊은 왕은 대도에서 보낸 10여년 동안 많은 배반을 당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왕기를 따른 이들은

몇명 되지 않았다. 권력에 붙었다가 왕이 되지 못하자 많은 이들이 미련 없이 떠났다. 공민왕이 10대에 겪은 배신의

경험은 총명하고 재능이 넘쳤던 왕기(공민왕恭愍王)가 왕이 되어서도 신하를 믿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조일신이 부원배인 기철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공민왕에게 죽임을 당한 후, 3년 7개월 지난후에 공민왕은

기철 일파를 전부 제거하면서 반원정책을 시작한다.

 

직책연표

 

1340년 03월 13일 소부윤(小府尹)일 때 왜구를 원으로 압송해갔다.

1341년 05월 00일 왕기(王祺공민왕)가 원으로 갈 때 호종하여 따라갔다.

1351년 10월 06일 참리(參理) 원(元)이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를 국왕(공민왕)으로 임명하고.

          충정왕(忠定王)은 강화도에 유배 보냈다가 살해했다.

1351년 11월 29일 찬성사(贊成事)

1351년 12월 17일 공민왕이 원에서 돌아와 22세 나이로 즉위하였다.

1352년 06월 01일 공민왕을 따른 공로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으로 상(上)공신에 책록(策祿)됨.

1352년 09월 02일 판삼사사(判三司事)

1352년 09월 29일 공민왕의 명으로 왕권을 위협하던 부원배 기씨일당을 제거하려 했으나,

          기원(奇轅)을 죽이고, 기철(奇轍)등 나머지 부원배는 놓쳤다.

1352년 09월 30일 우정승(右政丞)

1352년 10월 02일 좌정승(左政丞) 판군부감찰사(判軍簿監察事)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1352년 10월 05일 부원배 기철 일당 처결하려다 기원(奇轅)만 처단하고, 실패하여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함.

1353년 01월 07일 공민왕이 기원(奇轅)의 모친을 찾아가 연회를 열었는데, 기철 일당을 제거하기전 8번이나 

          연회를 열고, 이 연회 비용은 국가의 재정을 흔들 정도였다.

          기철과 기원의 모친은 공민왕과 함께 남면을 보고 앉아 공민왕과 똑같은 지위를 누렸다.

          기철(奇轍) 또한 공민왕 앞에서도 왕과 대등한 위세를 누렸으며, 공민왕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다.

          기철과 가까운 부원배들이 다시 관직을 차지해 국정을 농단하며, 왜구의 침공으로 백성의 고난은 지속되었다.

          기철의 부친은 경왕(敬王)은 추봉(追封)되고, 3대 조상 모두 왕으로 추증하였다.

1356년 05월18일 공민왕이 조일신의 부원배 제거 실패 후, 3년 7개월만에 기철 일당을 전부 척결하였다.

 

가족관계

 

조일신(趙日新) 6世 조위(趙瑋)의 외아들

 

부친은 조위(趙瑋) 모친은 금성나씨(錦城羅氏)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나유(羅裕)의 따님.

1남을 낳았다.

장남 : 조일신이 죽임을 당하고, 원에서 고려로 끌려와 노비가 되었고, 죽임을 당함.

        부모가 지어줄 수 없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여기에도 이름을 적지 않는다.

 

배위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홍탁(洪鐸)의 따님. 모친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따님. 권준은 6世 조련(趙璉)의 사돈으로 조련의 장녀와 권준의 장남 권렴(權廉)이 혼인을 하였다.

          조부는 인성군(麟成君) 홍선(洪詵) 증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홍백수(洪百壽)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 홍상재(洪尙載) 평리(評理)

          차남 : 홍혜찬(洪惠贊) 대선사(大禪師)

          삼남 : 홍개도(洪開道) 대언(代言)

          사남 : 홍창도(洪昌道)

          장녀 : 7世 조일신(趙日新)

          차녀 : 원주원씨 원귀수(元龜壽) 재신(宰臣)

          삼녀 : 파주염씨 염대유(廉大有) 밀직(密直)

          사녀 : 충혜왕의 후궁 화비홍씨(和妃洪氏)

 

외조부 금성나씨(錦城羅氏) 나유(羅裕)

 

금성나씨(錦城羅氏)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나유(羅裕).

부친은 형부상서(刑部尙書) 나득황(羅得璜) 조부는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太中大夫 禮部尙書 知都省事)에

추증된 나효전(羅孝全). 모친은 배천조씨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조문주(趙文柱)의 따님으로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다.

나유는 정숙공이 일본정벌을 할 때 김방경과 함께 공훈을 세웠으며, 합단적을 평양과 세종시에서 토벌하였다.

정숙공이 지도첨의사사 일 때 주지밀직사사를 맡았다. 충렬왕 때 합포(合浦)의 지휘관으로 나갔는데 의례에

밝다고 하여 왕이 나유를 특별히 불러 팔관회(八關會)의 의례를 맡길 정도였다.

아들은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로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따님과 혼인하였는데

민지는 6世 조연수가 과거에 합격할 때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했다. 지공거(知貢擧)는 안향(安珦)이다.

나유는 예의에 밝고 옥사(獄事)의 분명하게 판결하였고, 또한 용맹이 있어 전쟁에 임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아 변방에서 자주 공을 세웠다.

후손 중에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羅大用)과 대종교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 나철(羅喆)이 있다.

1남 2녀를 낳았다.

          장남 :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

          장녀 : 남양홍씨(南陽洪氏) 장간공(莊簡公) 홍융(洪戎) 삼사사(三司使) 역임.

          차녀 : 장경공(莊景公) 6世 조위(趙瑋)

 

외숙부(外叔父) : 나익희(羅益禧)

 

나익희(羅益禧) 양절공(良節公) 배위 여흥민씨 민지(閔漬)의 따님.

나익희는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그해에 죽었다.

일찍이 계림윤(雞林尹)을 지내고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를 세 번이나 지켰는데, 그 때 청렴하고 부지런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용모가 크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일에 임하면 강개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물러나서도 정사와 민생의 괴로움에 항상 관심을 가졌다.

3남 1녀를 낳았다.

         1남 : 나영걸(羅英傑)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고려말 7世 조충신과 함께 장사성(張士誠) 토벌에 참여.

                조일신이 죽임을 당할 때 곤란을 겪음.

         2남 : 나준걸(羅俊傑)

         3남 : 나열걸(羅烈傑)

         1녀 : 전주최씨(全州崔氏)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 첨의참리(僉議參理) 역임.

                부친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는 6世 조련과 함께 관직 생활을 했으며, 원의 수시력(授時曆)를

                모두 배워 돌아와 세종 때 까지 사용되었다. 최문도는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책을 즐겨 읽으며

                부모 섬기기를 효성스럽게 하였다. 성품은 따뜻하고 선량하여 사람들은 한 번도 그가 갑자기 성을 내거나

                기뻐 날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모부(姨母夫)

 

남양홍씨(南陽洪氏) 장간공(莊簡公) 홍융(洪戎) 삼사사(三司使) 역임. 부친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홍진(洪縉)

초배 금정나씨 나유의 따님. 이배 만호(萬戶) 황원길(黃元吉)의 따님.

5남을 낳았다.

          1남 : 홍주(洪澍) 남양군(南陽君) 첨의상의 삼사우사(僉議商議 三司右使)

          2남 : 홍언박(洪彦博) 배위 안동권씨 권준(權準)의 따님. 우정승(右政丞)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조카이다.

                 홍언박의 손자가 공민왕을 살해한 홍륜(洪倫)이다.

          3남 : 홍언유(洪彦猷) 중대광 남양군(重大匡 南陽君)

          4남 : 홍언수(洪彦脩) 검교참지문하부사(檢校叅知門下府事)

          5남 : 무명(無名)

 

주석 : 조일신은 원에서 세우는 어리고 능력이 부족한 8살의 충목왕과 11살의 충정왕이 아닌, 공민왕을 10여년을

        따르며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다. 22세의 젊은 공민왕은 조일신을 앞세워 원의 간섭을 벗어나려 부원배인

        기철 일당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오히려 조일신을 처형했다.

 

        공민왕은 3년 7개월후인 1356년 5월 기씨 일당을 전부 처단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반원정책을 실행한다.

        조일신이 부원배를 척결하다 실패하자, 공민왕은 가차없이 조일신을 죽이고, 원과 기철일파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공민왕은 결국 조일신의 시작한 부원배 척결과 반원정책을 시작하게 된다.

 

        과연 10여년을 호종하고 공민왕을 왕으로 만든 조일신이 공민왕이 즉위한지 10개월만에 공민왕과의

        상의와 허락없이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일신은 공민왕과 함께 고려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기철 일당의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있었다. 기철의 차남과 이제현의 손녀가 혼인하였으므로 공민왕과 조일신은 권력을 장악한 기철 일당과

        인사권을 장악한 이제현과의 다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공민왕이 원하던 것이었을 것이다.

 

       원 간섭기 왕의 권위는 원에서 정해주고 있었다. 고려는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무신들은 고려왕실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무신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자의 반 타의 반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 황제의 사위로 무신들의 무력을 억제하던 권위가

       기철의 여동생이 원의 황후가 되면서 황제의 사위인 고려왕의 권위는 기철 일파 보다 약해졌다.

       사위의 권위보다 황후의 권위가 더 높았다.

       이것은 새로 왕이 된 공민왕에게는 왕권을 유지하는데 치명적 단점이었다. 하지만 왕은 경험이 적었다.

 

       기황후의 지원으로 왕이 되었는데, 급하게 기황후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공민왕에게도 위험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조일신을 앞세운 기씨 일파 제거에 실패한 공민왕은 처절하게 기철일파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련 없이 조일신을 참형에 처하고 시간을 기다렸다.

 

       원은 한족의 반란과 기황후의 정치 농단으로 급속하게 약해져 갔다.

       그리고 공민왕은 때를 맞추어 기철 일파를 제거한 후,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새로 등장한 세력은 기철 일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무신세력들과

       홍건적, 합단적, 왜구를 물리친 새로운 무장 세력이었다.

 

       5世 정숙공이 충선왕의 개혁 의지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다 원과 부원배들에게 고난을 겪은 지 54년이 지나서,

       7世 조일신이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다 원과 부원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일신의 처자(妻子)는 기철의 조카인 기천린(奇天麟)에게 노비로 주었다.

       외아들은 원에서 고려까지 끌려와 노비가 되고 죽임을 당했다.

       조일신을 죽이고, 처형한건 공민왕이 아니라 원황실이자 기철 일당이었고, 공민왕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 글을 홍탁의 따님과 부모가 지어줄 수 없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조일신의 아드님에게 바친다.

 

출처 : 평양조씨대동보,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사편찬위원회. 금성나씨족보

 

작성자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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