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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평원군(平原君) 조천미(趙千미)

 

직책연표

 

충숙왕때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역임.

시호는 평원군(平原君)이다.

 

밀직부사는 밀직사(密直司)에 소속된 종2품 관직으로 왕명의 출납(出納), 궁궐의 경호, 군사 기밀 등 맡아보던 관청이다.

백관의 서무(庶務)를 관장인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양부(兩府)로 불리었다.

 

진현관은 고려 학문기관인 관전(館殿)으로 문신 중 재학(才學)이 있는 자를 뽑아 겸관으로 왕을 시종하게 하였다.

처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충렬왕 때이지만 확실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다. 1308년 충선왕이 정권을 잡고 예문춘추관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치하여 종2품의 대제학, 정3품의 제학, 정4품의 직제학을 두었고, 1356년(공민왕 5) 집현전으로 고쳐

 대학사·직학사를 두었다. 1362년 다시 진현관으로, 1369년 집현전으로, 1372년 또다시 진현관으로 고쳤다.

1420년 세종2년 집현전으로 이름을 고치고, 많은 학자들을 모아서 국가통지체계를 연구하게 하였다.

 

가족관계

 

7世 조천미(趙千미) 6세 조서(趙瑞)의 차남

 

부친은 조서(趙瑞) 모친은 청주한씨 한강(韓康)의 따님

 

배위는 전주김씨(全州金氏) 흥령군(興寧君) 김우창(金宇昌) 따님. 김우창의 모친은 언양김씨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김전(金佺)의 따님. 조부 김혼(金揮)은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자, 왕을 대신해 행성일을 맡아보았다.

        그 뒤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해지고, 벼슬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증조부는 몽고군을 격퇴한 호국영웅 김경손(金慶孫) 장군이다.

        김경손장군은 원종(元宗)의 처삼촌이자 충렬왕(忠烈王)의 외종조부이다.

        7남 3녀를 낳았다.

 

        장남 : 상서(尙書) 조문구(趙文句) 무후(无后)

        차남 : 행성원외(行省員外) 조문통(趙文通) 육부(六部)의 으뜸 벼슬. 무후(无后)

        삼남 : 시랑(侍郞) 조만경(趙萬慶) 무후(无后)

        사남 : 종부부령(宗簿副令)역임. 상장군(上將軍)사도(司徒) 조문경(趙文慶)

                1녀를 낳았다.

        오남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덕룡(趙德龍) 무후(无后)

        육남 : 공부전서(工部典書) 조문신(趙文信)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왜구를 토벌할 때 종사관(從事官) 역임.

                 정랑공파(正郞公派) 파조 조승(趙乘)의 조부이다.

                 1남 1녀를 낳았다.

        칠남 : 상서(尙書) 조문도(趙文度) 무후(无后)

 

       장녀 : 안산김씨(安山金氏) 김성경(金星慶) 통훈대부 진주목사(牧使), 삼사좌사(三司左使) 역임.

               부친 대제학(大提學) 김원상(金元詳). 조부 충익공(忠翊公) 김위(金渭). 안산김씨는 우리처럼

               재상지종 15가문중 하나이며, 대부분의 안산김씨는 7世 조천미의 외손들이라 할 수 있다.

               1남을 낳았다.

 

        1남 : 김정경(金定卿) 이조전서(吏曹典書)역임, 배위는 교하노씨 신양군(新陽君) 노영(盧渶)의 딸.

               개국원종공신이며 한성부윤일 때 박포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이 됨.

               연성군(蓮城君. 현 안산)에 봉해지고 위정공(威靖公)의 시호를 받았다.

               9世 조박(趙璞)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일 때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역임.

               5남 1녀를 낳았다.

 

        손자1 : 김지(金沚) 별장(別將)

        손자2 : 김관(金灌) 상호군(上護軍)

        손자3 : 김척(金寛) 별장(別將)

        손자4 : 김개(金漑)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시호가 평호공(平胡公)이다.

        손자5 : 김한(金瀚) 정종(定宗)朝)의 부마(駙馬)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다.

        손녀1 :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섬서령(司贍署令) 안철산(安鐵山)

                  부친 안성(安省) 1413년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조선 최초의 청백리 3인중 한 명이다.

                  사위 안절산은 광주안씨 서령공파(暑令公派) 파조이다.

 

        조천미의 외손인 김한金瀚)은 정종의 부마이고,

        조천미의 외사촌 한연(韓蓮)은 고손녀는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의왕후 한씨이다.

 

        차녀 : 전주최씨(全州崔氏) 대제학(大提學) 최사검(崔思儉). 부친 양경공(良敬公) 최문도(崔文度).

                 조부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 최성지는 1311년 4월21일 6世 조련(趙璉)이 첨의평리(僉議評理)

                 일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했으며 6世 조연수(趙延壽)와도 함께 관직에 있었다.

                 최문도(崔文度)는 자가 희민(羲民)이고,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책을 즐겨 읽으며 부모 섬기기를 효성스럽 게 하였다.

                 성품은 따뜻하고 선량하여 사람들은 한 번도 그가 갑자기 성을 내거나 기뻐 날뛴 적이 없다.

                 관직은 첨의참리(僉議叅理)에 이르렀다.

                 최사검의 자는 예향(禮鄕)으로 시와 글짓기를 잘 했다.

                 전주최씨 사도공계(司徒公系)의 모든 파조들은 모두 조천미 따님의 아들들이다.

                 5남을 낳았다.

 

                 손자1 : 최갑인(崔甲仁) 사온직장(司醞直長)

                           1354년 공민왕 3년 모친 평양조씨가 돌아가시니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손자2 : 최을의(崔乙義) 지밀직사(知密直使)

                           8世 조문신(趙文信)과 함께 우왕 원년 이인임을 모해했다 하여 귀양갔다가 모두 복직되었다.

                           8世 조박(趙璞)이 삼사우윤(三司右尹)을 지낼 때 밀직사(密直使) 역임.

                 손자3 : 최병례(崔丙禮) 판서(判書)

                 손자4 : 최정지(崔丁智) 총랑(總郞)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손자5 : 최무신(崔戊信)

 

        삼녀 : 평산신씨(平山申氏) 참판(參判) 신규(申珪). 부친 어사대부(御史大夫) 신군평(申君平).

                 조부 국자박사(國子博士), 도관직랑(都官直郞)역임.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신중명(申仲明).

                 1남을 낳았다.

 

                 손자1 : 신하(申夏) 자(字)는 하청(夏靑) 또는 윤여(允) 전서(典書)를 거쳐 한성윤(漢城尹)을 지냄.

                           외손녀인 청주한씨가 신의왕후(태조의妃)로 추존되자 숭록대부(崇祿大夫)

                           병의육덕보조공신秉義毓德補助功臣에 책록되었다.

                           손자 신하는 평산신씨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파조이다.

 

외조부(外祖父) : 한강(韓康)

 

        6세 조천의 외조부 한강의 부친은 예빈경(禮賓卿) 한광윤(韓光胤)이고. 모친은 나주호장(羅州戶長) 진각(陳慤)의 따님.

        배위는 함종임씨 임전우(任全祐)의 따님이다, 시호 문혜공(文惠公)으로 초명은 한경(韓璟)이다.

        1243년 고종(高宗) 때 16세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을 다스렸는데, 둔전(屯田)이 중지된 곳을 다시 개척하여

        곡식 2,000석을 거두었으며, 향리들이 함부로 것을 중지해서, 백성이 편안 해졌다.

        이러한 공으로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영전하여, 이후 공부시랑(工部侍郞)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서 1271년 5월

        대사성(大司成)으로 양순(梁淳) 등 53명을 선발함. 1375년 10월 좌복야(左僕射) 한강(韓康)이 지공거(知貢擧), 승선(承宣)

        박항(朴恒)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최지보(崔之甫) 등 25명, 명경업(明經業) 1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1284년 10월 원부(元傅) 허공(許珙) 한강(韓康) 등이 역사서 고금록(古今錄)을 편찬 완성하였다.

        1288년 10월 찬성사(贊成事) 한강(韓康)이 지공거(知貢擧), 국자좨주(國子祭酒) 이익배(李益培)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이부(李榑) 등 31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불교를 몹시 좋아하여 충렬왕에게

        전란 중 피폐해진 국가이념인 불교 중흥을 위하여 법화경(法華經)의 수량품(壽量品)을 추천하였다. 그후에도 왕에게

        많은 정책을 제안하였는데 혹독한 추위와 무더위에 미음을 두어서 굶주리고 목마른 백성을 진휼하는등

        전쟁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안정을 도모했다.

 

외숙부(外叔父) : 한사기(韓謝奇), 한사보(韓謝譜), 한사수(韓謝壽)

 

        한사기(韓謝奇) 간의대부(諫議大夫)역임. 초배 평강채씨 채인규(蔡仁揆)의 따님 이배 고양군부인 정씨(鄭氏)

        1남 : 한악(韓渥) 시호는 사숙공(思肅公) 정당문학(政堂文學) 우정승(右政丞)

               손자 한수(韓脩)가 6세 조위(趙瑋)의 묘지명을 쓰고, 지은이는 가정 이곡(李穀)이다.

               한수의 아들은 한상경(韓尙敬)으로 개국공신이다.

        2남 : 한영(韓永) 정혜공(正惠公) 검교판서(檢校判書) 원나라 하남부총관(河南府摠管)

        3남 : 한준(韓浚)

        4남 : 한연(韓蓮) 아들 한유(韓裕) 손자 한규인(韓珪仁) 증손자 한경(韓卿)이고,

               한경의 따님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로, 태조 이성계(李成桂) 첫째 부인이다.

        1녀 : 여산송씨 송운(宋惲) 아들 송선(宋璿)은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조(外祖)이다.

 

        한사보(韓謝譜) 전교(典校) 청주목사(淸州牧使)

        1남 : 한홍시(韓弘時) 부안군(扶安君)

 

        한사수(韓謝壽) 판관(判官)

        1남 : 한옥(韓沃) 예빈시경(禮賓寺卿)

        2남 : 한담(韓澹)

        3남 : 한택(韓澤)

 

이모부(姨母夫)

 

        죽산안씨 안전(安戩)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경상(慶尙)·충청(忠淸)·서북(西北) 3도(道)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역임.

        1남 : 안유충(安惟忠) 판서(判書) 역임. 6世 조련(趙璉)의 사위인 권렴(權廉)의 고모부이며, 익제 이제현과 동서지간이다.

 

 

출처 : 평양조씨대동보, 고려사, 고려사절요, 청주한씨중앙종친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주김씨족보,

        안산김씨족보, 전주최씨중앙화수회, 평산신씨대종중,

작성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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