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旋)
법호: 순암(順菴) 당호: 허정당(虛淨堂)이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
자은군(慈恩君) 의선공(義璇公) 삼장공(三藏公) 조순암(趙順菴) 조의선(趙義旋)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고 칭송되었으며 익재난고, 급암집, 가정집, 목은집등 많은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는 율장(律藏), 경장(經藏), 논장(論藏)에 통달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한국불교사상에서는 의선(義旋)이 유일(惟一)하다.
15세에 출가하여 천태종 개성 묘련사에서 원혜국사(圓慧國師) 경의(景宜)의 제자가 되었으며,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또한 백부인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의 제자이기도하다.
천태종은 고구려때 중국을 통해서 들어와 고려 초기에 제관(諦觀)과 의천(義天)의 활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몽고칩입으로 국토는 황페화하고 수많은 불교 사찰은 사라져갔다. 이때 원묘요세(圓妙了世)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켜 불교의 중흥과 전쟁으로 황페해진 국가를 일으키려 노력하였다.
충렬왕때 천태종은 다시 국가의 지원과 묘련사의 중창으로 고려왕실의 중요한 불교신앙이 되었으며,
어려운시기에도 국가를 재건하려 왕실과 불교계는 여러가지 노력을 하였다.
묘련사를 중창한 의선은 불경의 간행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고려는 다시
많은 절을 중창하고, 전쟁으로 소멸해가던 여러가지 불교예법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충선왕의 지원과 노력으로 원나라의 새로운 황제가된 무종(武宗)은 고려의 많은 문물을 받아드렸는데 개성 묘련사에서
의선이 행한 수많은 불교의 중흥의 경험은 의선이 원나라로 가는 계기가 되었으며, 원나라 진종(眞宗)의
부친의 위패를 모신 북경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주지가 될 수 있었는데, 진종과 의선은 모두 충선왕의 처남이다.
이색의 부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허정당기(虛淨堂記)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璇)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공은 또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얻는 대로 모두 보시를 하면서,
불승(佛僧)을 공양하고 경장(經藏)을 정비하고 빈객을 봉양하느라 날마다 쉴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다장(多藏)의 예(穢)를 다함이 없는 보장(寶藏)으로 바꾸어 돌아가게 하니,
어찌 세상에서 강상(綱常)을 무시하고 공적(空寂)에 얽매일 줄만 아는 자들이 방불할 수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공이 세간을 떠나지 않고도 세상을 초월할 수 있고,
마음을 사역당하는 일이 없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외물에 변화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진기한 것도 동요시킬 수가 없고,
환난이 닥쳐도 미혹시킬 수가 없고,
성색(聲色)도 방탕하게 할 수가 없으니,
어디를 간들 허(虛)하고 정(淨)하게 되지 않겠는가.
만약 외물이 없어진 뒤에야 허하게 되고,
예(穢)가 없어진 뒤에야 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반드시 성시(城市)를 멀리 떠나 기한을 참아 내고,
구구하게 힘을 쓰며 급급하게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면,
내가 알기에 그것은 도와 더욱 멀어지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삼장법사 의선은 쿠빌라이-충렬왕-조인규-의선과, 충선왕-조인규-조비-의선으로 연결되는 탄탄한 속가 배경에,
승려로 율장, 경장, 논장에 통달한 탁월함까지 갖추어 마침내 삼장법사라는 영예로운 법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삼장법사 의선은 원종-충렬왕-충선왕-충숙왕으로 이어지는 고려와,
쿠빌라이-성종-무종-인종-영종-태정제로 이어진 원 황실의 화합과 대립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두루 인정받은 고승이었다.
삼장법사 의선은 15년 동안 원나라 왕실과 본국의 왕실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당대의 고승이면서도
소인묵객(騷人墨客)들과 어울려 음풍영월(吟風咏月)을 즐기며 검소하고 평범하게 살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우리에게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의선 만큼 여러 사찰의 주지를 오랫동안 중임하며 본국과 중국에서 활동한 승려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대자(大字)를 잘 써서 자신의 거실인 허정당(虛淨堂),
경주 계림부공관서루(鷄林府公館西樓)의 의풍루(倚風樓),
묘련사불전(妙蓮寺佛殿)의 편액 등을 남겼다.
또한, 묘련사의 두 개의 석지조(石池竈) 중 잃었던 한 개를 찾아내어 교분이 두터웠던
이제현(李齊賢)을 시켜 석지조기(石池竈記)를 짓게 하였다.
속가 배경
삼장법사 의선(1283~1355) 정숙공의 사남
부친은 조인규(趙仁規) 모친은 한산조씨(漢山趙氏) 조온려(趙溫呂)의 따님
정민공 조서, 충숙공 조련, 문극공 조연수의 동생이며 장경공 조위의 형이다.
불사 연표
15세에 묘련사에서 출가한 후에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1295년 스승인 원혜국통 경의(景宜)가 국사가 되었다.
1302년 묘련사에 제국대장공주(1297년 사망)의 영당이 설치되어 제와 향을 올리는 행향추복(行香追福)등을 하며,
왕실의 제사를 주관하면서 각종 예법과 행사의 진행 방법을 익히고 배움.
1310년 밀양 영원사(瑩原寺)에 주석하면서 금당과 낭무를 중수했다
1313년 11월 충숙왕으로부터 국통(國統)의 직위를 받았다.
1314년 충숙왕 1년 원나라 대도에서 병에 걸려 치료하여도 회복되지 않아 고려 개경 불은사(佛恩寺)에 와서
약사여래상 앞에 나아가 열심히 기도를 올리던 중 영단(靈丹)을 주는 신인(神人)을 현몽하고 고질병이 나았다.
이에 감동되어 장륙금신(丈六金身)의 불상과 두 보살상을 조성하고, 이어 대불전(大佛殿) 및 낭무(廊廡)등을
건립하는등 20여 년 동안 원나라와 고려를 왕래하면서 불은사를 크게 중수하였다.
1325년 충선왕이 대도(북경)에서 졸하였다.
1332년 원제(元帝)의 총애를 입어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三藏法師)의 법호를 받고
복국우세정명보조현오대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師)삼중대광자은군(三重大匡慈恩君)에
봉하여져 북경 대천원연성사(黑塔寺)의 주지로 임명 되었다.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을 편찬하였고. 뒤에 고려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자신의 재산과, 인연 있는 중생들이 낸 기부금을 모아,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을 예참하는
도량의식집인 미타참법(彌陀懺法)을 널리 보급시켜 실천적이면서 민중적인 불교의 홍보를 위해 애썼다.
1333년 충숙왕이 의선을 대도의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을 중창하고 주석하게 하였다
1336년 충숙왕 복위 5년 충숙왕에게 묘련사의 중수를 권하여 도량을 일신시켰다. 어릴적 본 묘련사 석조지를 찾아낸
일화가 익재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있다.
1338년 충숙왕 복위 7) 가을에 이제현을 불러 개경 불은사 약사여래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영단(靈丹)을 주기에 복용하였더니, 그 다음 날에 병이 즉시 나았고, 그리고 29여년동안 불사를 이어갔다는
불은사중건기란 글을 남기게하였다.
불교 중흥 업적
묘련사 중흥비(妙蓮寺 重興碑)
고려국(高麗國)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 중건기
북경 대천원연성사(大天源延聖寺) 태정제의 부친을 모신 절
북경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敎寺)
밀양 영원사(瑩原寺)
임실 진구사(珍丘寺)
수원 만의사(萬義寺)
개경 국청사(國淸寺)
연성사에서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을 중각하고 널리 보급하였고, 고려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의선의 법계
원혜국사(圓慧國師) 경의(景宜) : 법통(法通)을 내려준 스승이다. 원혜국사가 왕의 뜻을 받들어,
묘련사의 초대 주맹이 되어 법화경, 법화문구, 법화현의등을 강의하며 묘련결사를 주도하였다.
무외국사(無畏國師) 정오(丁午) : 의선의 백부인 혼기(混其)이다. 수원 만의사를 중창하였다.
1306년 대선사(大禪師)
1307년 왕사(王師)
1308년 선교각종산문도반총섭조제(禪敎各宗山門道伴總攝調堤)
1309년 천태종 본산인 국청사(國淸寺)에 주석.
1313년 국통(國統)
1314년 영가종의(永嘉從義)의 주석서인 천태사교의집해(天台四敎儀集解)를 개판·유통하였다.
1315년 국청사 낙성법회에서 법화예참(法華禮懺)을 편찬하였다.
의선의 법맥
희암(熙菴) : 정숙공의 증손자 조순(趙恂)으로 법명은 묘혜(妙慧)이다. 많은 불교 경전을 간행했다.
중국에서 의선보다 뛰어나다는 평가와 불타와 같다는 극찬을 들었다. 희암이 간행한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義)는 경주 기림사(祇林寺)에 있는데 보물로 지정되었다.
한수(韓脩) 이색,이숭인등 유생들과 교류가 있었고. 대사도희암공(大司徒煕菴公)이라는 이색의 시가 있다.
나암원공(懶菴元公) : 천태종(天台宗)의 판사(判事) 복리군(福利君)에 책봉되었다. 유자(儒者)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였는데 유생들은 그를 나잔자(懶殘子)라 불렀다. 오동(吳仝)의 아들인 휴상인을 제자로 두었다.
개경의 광제사,보제사,지장사,신륵사 등에 머물렀으며 의선이 의천의 후신이라며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목은이색, 진사(進士) 오동(吳仝), 휴상인(休上人), 정랑(正郞) 홍의원(洪義元), 내시(內侍) 김정신(金鼎臣)
광양군(光陽君) 이공(李公) 중랑(中郞) 김군필(金君弼), 정랑(正郞) 한득광(韓得光)
이영(李穎)등과 교류가 깊었다.
휴상인(休上人) : 오동(吳仝)의 아들로 나암원공인 나잔자에게 논어, 맹자등을 배웠다.
이색보다 나이가 두어 살 위며 사이가 매우 좋았다.
요원(了圓) : 휴상인과 더불어 백련결사정신을 계승한 천태종의 고승. 법화영험전을 찬술하였는데 발문은 정숙공의
손자 보해가 썼고, 그의 조카이면서 조준의 형인 묘혜(본명은 조순趙恂)가 수원 만의사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요원은 묘혜와 함께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慘助宣講義)도 간행하였다.
이 책의 발문은 1378년(우왕 4)에 영암사 주지였던 선사 묘혜가 썼다.
이제현(李齊賢 1288~1367) : 호 익재(益齋) 경주이씨 고려 문하시중을 엮임. 의선과 교유하며 대도에서도 함께 활동했다.
의선이 중창한 묘련사 충흥비와 모련사 석조지기 글이 문집인 익재난고에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은
어릴적 부친인 동암(東菴) 이진(李瑱)따라 혼기 문하에 드나들었는데 이때부터 의선과 친하게 지냈다.
민사평(閔思平 1292~1359) : 호는 급암(及庵) 여흥민씨 찬성사 엮임. 6세 충숙공 조련의 장인이 안동김씨 김흔인데
첫째 사위가 민사평의 부친 문순공(文順公) 민적(閔頔)이다.
문집 급암집(及菴集)에 의선이 90세 다되어서 졸하였을때 곡하여 쓴 시가 전한다.
이곡(李穀 1298~1351) : 호 가정(稼亭) 한산이씨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38년 불은사로 이곡을 초정하여
불은사중건기를 짓게하였는데 불은사 약사여래 전설과 불은사를 그동안 비축해 둔 물자는 물론이요.
자기의 소유까지도 모두 희사해서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공들여 지었다하며,
이곡이 원의 과거에 차석(성적은 장원인데 고려인이라 차석이됨)으로 합격하여 대도(북경)에 머물때
의선과 함께 하며 의선의 기록을 가장 많이 남겼고,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많은 기록이 있다.
아들 목은 이색과 의선의 제자들 또한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목은집(牧隱集)에 있다.
또한 6세 조연수의 사위 윤지표(尹之彪)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이색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서 함께
원에 사신으로 갔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세월이 흘러 후손끼리 혼인을 하게된다.
의선은 단양 구인사에 한국천태종 "의선대선사 순암조사" 법명으로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다장(多藏) : 사적으로 보물을 많이 쌓아 놓는 것을 말함.
보장(寶藏) : 보물을 사유화 하지 않고 부처와 민중의 보물화 하였다는 것을 말함.
석지조(石池竈) : 돌로 만든 차(茶)를 끓이는 도구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 의선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이 불경은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禮拜)하고 죄업(罪業)을 참회(懺悔)하며 죽은 사람에 대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 및 의례절차를 담은 불교 의식집. 조선 성종 5년 1474년에 왕실에서 정희왕후가 금속활자로
세종과 세조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되었고, 이때에 간행된 불경들은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고도 한다.
출처 : 평양조씨대동보, 고려사, 고려사절요, 익재난고, 급암집, 가정집, 목은집, 금강신문사, 동국대계미향교수논문
작성자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