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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숙공 사당기(趙貞肅公 祠堂記)

 

지정(至正) 원년(충혜왕 복위2, 1341) 봄 내가 정동막(征東幕)1)에 있을 때 찬성사(贊成事) 조공(趙公)이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함께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청하면서, “선군(先君) 정숙공(貞肅公)은 조정에 공로가 있고 덕을 후세에 끼쳤는데, 비록 무덤에 묘지명이 있으나 신도(神道)에 비가 없습니다.

집안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는 사람들이 찾아보기가 어려워, 오래 되어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 선군은 일찍이 집 뒤에 당(堂)을 짓고 평소 거처하는 처소로 삼고 지원(祗園)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그 가운데에 선군의 화상을 걸고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네모난 돌을 뜰 가운데에 세워 그 공덕을 새겨 자손들이 익혀 듣고 새겨서 선군의 뜻과 가르침을 잊지 않게 하려 합니다.

그대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임기가 차서 원나라 수도로 돌아가게 되어,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지금 정숙공의 아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연산(燕山)에 머무를 때 매번 나를 볼 때 말이 그 일에 미치게 되면, 또 말하기를, “비록 불법(佛法)을 배우지만 끝이 없이 지극한 아버님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이 더욱 간절하고 청하는 것이 더욱 근실했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그 대강을 서술하고자 한다.

 

천하가 생긴지 오래되어, 한 번 잘 다스려 지면 한 번은 어지러웠다. 가까이 당나라가 쇠약하자 오계(五季)가 크게 혼란하였다. 요(遼)나라와 금(金)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남북으로 분열되고 전쟁이 그치지 않아,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하늘이 경사스런 운수를 열어 주어 성인이 계속해서 나고 이름난 신하가 많이 나와서 육합(六合 : 상·하와 사방)을 하나로 통일하고 여러 사람의 뜻을 정하였다. 문궤(文軌)2)를 같이 하고 풍속을 변화시켰다. 주역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해 나온다.” 하였으니, 그것은 오직 원나라뿐이다.

 

정숙공은 태종(太宗) 9년 정유년(고종 24, 1237)에 태어났다. 그 때 겨우 변채(汴蔡)3)의 땅을 거두어 들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남쪽으로 정벌하고 북쪽으로 토벌하는 것이 끝나지 않았다. 고려는 비록 이미 귀부했으나 권신(權臣)의 통제를 받아 강화에 있으면서 술직(述職)4)하는 것을 제때 하지 않아 원나라 군사가 국경을 압박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안위에 처했고. 인심이 순응하거나 배반하려는 무렵이었다. 풍속과 습관이 변하기 시작하여 삼한이 다시 처음과 같이 건설되는 때였다.

 

당시 이(夷)와 하(夏)가 처음으로 통하여, 위로 덕을 선포하고 아래로 정을 통하는데 통역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공은 화어(華語)를 잘하고 언변에 능숙하여, 발탁되어 높이 날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 조정에서 빈객들과 말을 통하였고, 끝에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의 일생을 보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지원(至元) 기사년(원종 10, 1269) 공은 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갈 때 함께 갔다.

갑술년(충렬왕 즉위, 1374) 황제의 딸을 맞이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임금을 대하면 이해(利害)를 아뢰고 죄를 질 각오로 어렵고 험한 일을 겪으면서 권세있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였다.

우리 백성들이 희희낙락하게 베개를 편히 베고 지금까지 온 것은 공의 공로가 많았다.

 

처음 원나라에서 보낸 사신 흑적(黑的)이 감정을 품고 말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켜 황제에게 잘못 보고한 것,

탐라와 평양 사람을 원나라에 직속시켜 그 주인을 배반하게 한 것과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사 가운데 해를 끼친 자들을 모두 파면해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 유리하는 백성과 노략질을 당하여 요동과 심양에 붙들려 있던 자를 모두 제 나라로 돌아오게 한 것이라든가,

간사한 신하들이 의논을 발의하여 두 번째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롭게 한 일을 중지시킨 것도

모두 공이 황제에게 힘써 잘 대답한 때문이다.

 

무릇 왕이 공을 보내 황제에게 아뢰게 하면,

황제는 곧 공을 불러 들여 위로하고 공이 아뢴 것을 일찍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한번은 “너는 원나라 사람이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고,

말과 행동이 조금도 동쪽나라 사람 같지 않구나.” 라고 하였다.

아 나라를 중흥시킨 공은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구나.

 

공의 이름은 인규(仁規), 자는 거진(去塵)이다. 평양군 사람이다.

 

아버지 형(瑩)은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는 내원승(內園丞) 문간(文幹) 의 딸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부인의 꿈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얼마 있다가 태기가 있어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났고,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좀 자라 글을 읽을 수 있고 대강 뜻을 통하자, 곧 그만두고 무반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하급 간부로 시작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 어사중승(御史中丞), 좌승선(左丞宣) 이 되었다

네 번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가 되고 또 승진하여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이 되었다.

빈객에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가 되었다가 곧 평장시랑(平章侍郞)으로 승진되었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 특별히 가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嘉議大夫 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고,

이어 금으로 된 호부(虎符)를 받아 공의 능력을 드러내었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 시중(侍中)이 더해졌다.

대덕(大德) 을사년(충렬왕 31, 1305) 다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승진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나이가 많아 사직할 것을 청하자 공신 칭호를 하사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고 부를 설치하여 관원을 두게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공의 집에 가서 물어서 결정하게 하였다.

 

이듬해 병이 나자 아들들이 훌륭한 의원을 청하여 보게 하였다.

공은 “내가 머리 올려 상투를 짜면서부터 나라 일에 봉사하여 나이 이제 70이 넘었고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의원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라고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아들들이 모두 원나라 서울에 있고, 오직 충숙공 만이 옆에 모시고 있었다.

 

공이 부탁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을 다스려야 한다.

시경(詩經)에 ‘형과 아우가 있으면 실로 서로 좋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네 집에는 동기(同氣)가 많이 있으니 부디 화내고 다투지 말라. 남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너의 형제가 다 오거든 갖추어 기록하였다가 훈계하고 그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4월 25일에 병이 위독하므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운명했다.

나라의 여러 선비와 서민들이 쫓아가서 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이 평생에 정직하다고 들었더니, 이제 그대의 죽는 것을 보니 바로 살아있을 때를 알 수 있겠다.” 하였다.

 

부고가 왕에게 올라가자,

왕은 “하늘도 무심하여 원로를 남겨주지 아니하였다.”고 탄식하며,

부의하고 장사지내는데 예절을 다하게 하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 내려 주었다.

 

부인은 사재경(司宰卿) 조온려(趙溫呂)의 딸로,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과거에 급제하여 특별히 회원대장군 고려부도원수 삼사사(懷遠大將軍 高麗副都元帥 三司使)로 임명되었고 시호는 장민공(壯敏公)이다.

둘째 연(璉)은 중의대부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中議大夫 王府斷事官 僉議贊成事)이며,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셋째 연수(延壽)는 춘관(春官)에 급제하여 특별히 소용대장군 관군만호 삼사사(昭勇大將軍 管軍萬戶 三司使)에 임명되었다.

넷째 의선(義旋) 은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 知見無礙 三藏法師)로서 천원 연성사주지 겸 본국영원사주지 본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선사 삼중대광 자은군(天源 延聖寺住持 兼 本國瑩原寺住持 本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 三重大匡 慈恩君)이다.

다섯째 위(瑋)는 중대광 첨의찬성사(重大匡 僉議贊成事)이다.

 

큰 딸은 좌승선(左丞宣) 노영수(盧穎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강절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대호군(大護軍) 백승주(白承珠)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호부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몇 명이 있다.

 

원수(元帥 : 서)의

장남 굉(宏)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부령(典校副令)이다.

다음 천이(千䙫)는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부사(密直副使)이며,

다음 천유(千裕) 는 원윤(元尹)이다.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왕진(王瑱)에게 시집갔다.

 

단사관(斷事官 : 연)의

장남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郎將)이다.

다음 덕유(德裕)는 지금 봉의대부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奉議大夫 王府斷事官 判典儀寺事)이다.

그 다음이 윤선(允瑄)이고,

그 다음은 보해(普解)이며 머리를 깎고 중천태교선(中天台敎選)이다.

큰딸은 만호(萬戶) 권렴(權廉)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시집갔다.

 

만호(萬戶 : 연수)의

장남 충신(忠臣)은 지금 선무장군 관군만호 삼사좌윤(宣武將軍 管軍萬戶 三司左尹)이며,

다음은 신(信)이다.

딸은 낭장(郎將) 김휘산(金暉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시집갔다.

 

찬성사(贊成事 : 위)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외손도 몇 명있다.

 

장녀의 아들 탈(頉)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 있다.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다.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시집갔다.

 

넷째 딸의 큰 아들 효신(孝臣)은 지금 삼사좌윤이며,

다음 불노(佛奴)는 지금 익정시승(翊正寺丞)이고,

딸은 호군 민현(閔玹)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매우 많으므로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공은 성질이 명랑하고 민첩하며 외양이 웅장하고 크며 말이 적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물건에 접촉할 때 관대하고 화평하며 일을 대하면 강직하고 정대하여 4대의 임금을 도와서 장하게도 원로가 되었다.

성품이 또 착한 것을 좋아하여 남에게 물건을 주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더욱 불교에 독실하여 청계불사(淸溪佛寺)를 창건하고 임금을 위하여 복을 축원할 때, 묘전(妙典)을 금으로 쓰고 해장(海藏)을 먹으로 판박이고 불상(梵像)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이다.

 

집을 다스리는 데 엄격하고, 아들 가르치기를 옳은 것으로 하여 공이 늙기 전에도 많은 자손들이 달관명사(達官名士)가 되어서 중외(中外)에 널리 있었고,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따라서 효도하고 우애하기를 화락하게 하여 사람이 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시구(尸鳩)5)의 평균함과 척령(脊令)의 어려움을 급히 여기는 것에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보통 사람의 정은 오래 되면 날로 잊는 것인데, 공은 죽은 지 36년이 넘었지만 그런데도 또 인멸되지 아니할 것을 생각하여,

죽은 이 섬기는 것을 산 사람처럼 하는 것이 이 같으므로 이것을 기록하노라.

 

1) 원(元)나라에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임시 관청을 차렸었는데,

그것은 군(軍)에 관계되는 관청이므로 막(幕)이라고 하였으니 막사(幕舍)라는 뜻임.

2) 세상에 글(文)이 많지만 모두가 금·은 같은 것이고, 수레(車)가 많지만 모두가 바퀴로 굴러가는 것 같은 것으로

그 원칙대로 하여 온 세상을 하나로 통일하였다는 뜻.

3) 여진족(女眞族)이 건국하였던 금(金)나라는 한때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지금 북경에 서울을 두고 강성한 국가가

되었으나, 몽고족의 공격으로 북경에서 쫓기어 하남(河南) 지방인 변(汴) 지금의 개봉(開封)으로 서울을 옮기었으나

그것도 유지 못하고 또 쫓기어서 채주(蔡州)로 갔다가 채주의 함락으로 동시에 멸망되었다.

4) 제후나라의 임금이 종주국인 천자에게 가서 보는 것을 술직이라고 말하니 자기의 직무를 진술한다는 뜻임.

5) 시구(尸鳩)는 뻐꾹새인데 새끼를 기를 때에 먹이를 공평하게 잘 나누어 먹인다고 한다.

 

출처 : 평양조씨족보,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찬자 :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부친이다.

작성자 : 26세손 첨추공파 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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